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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2014년 9월 16일 화요일 복음 묵상)
작성자신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18 조회수671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4년9월16일 연중 제 2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울지 마라.” (루카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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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나요?
요즈음은 ‘엄마’, ‘아들’, ‘딸’, ‘죽음’과 같은 단어들을 접할 때마다, 바닷속에서 덧없이 사라져간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가슴에도 묻지도 못하고 울부짖는 부모들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혼자 된 여인의 외동아들이 죽었고, 그 장례 행렬을 보시게 된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의 아픔을 한 몸처럼 느끼시고, 결국 아이를 살려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는 복음 줄거리를 읽으면서,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가엾은 영혼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며 안타까워하실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작년에 같은 구절을 가지고 한 묵상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다시 한 번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연민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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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을 두고 사는 남편 잃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울음으로도 그 한을 채울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장례 행렬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그리고 가여운 마음이 드십니다.

“여인아, 울지 마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죽었던 아들은 살아나서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의 간단한 줄거리였습니다.
복음서에서 특히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연민의 예수님이십니다.
딱한 처지의 여인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일을 또 저지르고 마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던 연민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복음서에 나오는 연민, 즉 예수님께서 당시에 사용하시던 언어 아람어가 가지고 있는 연민이라는 단어의 뜻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 말 번역에는 ‘측은히 여기셔서’라든가, ‘가엾은 생각이 드셔서’라는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연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나 동정심하고는 다른, 보다 강한 마음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누군가의 아픔을 보았을 때, 오장육부가 뒤틀리는듯한 아픔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연민을 뜻합니다.
즉,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야만 해결이 될 수 있는 아픔을 가진 단어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소외 계층이라고 불리는 약자들에게 당신의 시간 대부분을 쓰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지나칠 수 없는 아픔을 느끼셨고,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 봅니다.
복음을 믿으며 그 안에 약속된 구원을 희망하며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가르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너무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께서 보이신 연민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좀 더 세상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연민에 약한 사람들이 가장 복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30609)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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