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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벽길의 축복 - 2014.9.22 연중 제25주간 월요일(순례34일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2 조회수880 추천수1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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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2 연중 제25주간 월요일(순례34일차), 잠언3,27-34 루카8,16-18

                                        
새벽길의 축복


오늘은 순례34일차가 됩니다. 
하루하루 충실하다보니 산티아고에, 집에 갈 날도 가까워졌습니다. 
산티아고까지 130km남았다는 표지석의 글자도 선명했습니다. 

산티아고와 집, 바로 산티아고가 상징하는 하느님이 집임을 깨닫습니다.  
'왜, 끊임없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는가?' 

영원한 본향집을 찾는 갈망의 사람이요, 지상에서는 영원한 나그네임을 상징합니다. 
'집에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homesick at home)', 바로 이것이 역설적 인간의 숙명입니다. 
지상에서의 집이 '참 집'이 아님을 반증합니다.

어제 순례33일차, 
오 세블에이오에서 여기 틀아이카스텔라까지 20.4km까지의 길이 
순례여정중 제일 아름다운 산길, 오솔길, 숲길이었습니다. 
계속 해발 1000m정도의 고산 오솔길을, 내내 묵주기도 바치며 숙소에 내려왔습니다. 

스페인 도착 후 어제에 이어 두번째 예쁜 새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새벽길의 축복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번처럼 새벽길의 은혜로움을 느끼기는 처음입니다. 

아주 예전 방인근의 새벽길이라는 소설도 읽은적이 있는데 그런 유가 아닙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5시에 미사와 아침기도 즈카르야 후렴을 바친후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거의 6시에 새벽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아침 8시 동터오기까지의 새벽 은혜로운 시간은 각자 걸었습니다. 
새벽의 대침묵중에 집중적인 묵상과 기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욹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에서 든든하외다."

시편 24장 말씀처럼, 묵주가 하느님의 지팡이가 되어 온갖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 냅니다.

여기서도 '삶은 선택'이란 진리를 깨닫습니다. 
새벽의 침묵을 택할 것인가, 낮의 관광을 택할 것인가, 
만약 주위의 경관을 두루 살피려면 새벽의 깊이를 포기해야 합니다. 

저희는 새벽을 택했습니다. 
부활을 상징하는 새벽이요 
옛 사막 수도승들도 동터오는 아침과 더불어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려 새벽같이 일어났습니다. 
또 하나의 잇점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오후 일찍 알베르게에 도착하므로 좋은 방을 배정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미국 생존 수도원의 티모데오 아빠스가 생각납니다. 
꼭 새벽 2-3시에 일어나 수도원 경내를 기도하며 거닐었던, 새벽을 사랑했던 수도승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수도승들은 대부분 새벽을 사랑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 모 대선 후보의 슬로건이 크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음을 기억합니다. 
여기다 '새벽이 있는 삶'이 덧붙는다면 얼마나 이상적인 영적 삶이겠는지요. 

많은 이들이 저녁도, 새벽도, 심지어 밤도 잊고 지내는 생존경쟁 치열한 삭막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무수한 영감들이 별처럼 떠오르는 새벽입니다. 
은총 가득한 새벽이지만 위험도 따릅니다. 
인적이 드물고 캄캄하여 이정표의 확인이 어려워 길을 잊기 쉽다는 것입니다. 
낮이라면 이런 염려는 거의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내 발의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이 옵니다."

새벽 어둔 길을 비추는 이마에 붙은 헤드랜턴을 보며 위 시편 말씀을 실감했습니다. 
칠흑같이 어둔 새벽, 앞서가는 불빛은 얼마나 고맙던지요. 
대낮같이 환한 문명의 시대라지만 역설적으로 영적으로는 불빛 없는 어둠의 광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 같은 가이드가 참으로 목마른 시대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8,16).

이마의 헤드랜턴을 통해 새삼스레 깨달은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강론을 쓰고, 미사를 드린 적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위 말씀을 '아무도 헨드랜턴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이마위에 부착해 따라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때로 빛을 따라 걷는 새벽길은 참 아름다운 장관입니다. 
빛으로 서로 깊이 연대해 있는 빛의 순례자임을 깨닫기도 합니다.

어제의 일화를 나눕니다. 
새벽길을 걸으면서도 따라오는 일행을 살펴야 하는데 도중에 약간 잊었습니다. 
길눈이 밝은 이냐시오 형제를 믿은 탓이 큽니다. 
사실 이정표만 잘 확인하면 대부분 외길이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습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뒤돌아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순례길과 도로가 만나는  바(bar)가 있는 지점에서, 
모든 순례자가 통하는 길목은 오직 이 하나뿐이기에 8-9시까지 기다렸습니다. 
수없이 핸드폰을 시도했지만 무위에 그쳤습니다. 

마침내 1시간 후,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냐시오 형제가 지친 모습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밑에 까지 단숨에 뛰어 갔습니다. 
루카복음 15장의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알듯했습니다. 
사람이 없는데 순례고 뭐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려도 함께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제님과 더불어 5명 정도의 순례자가 길을 잘못들어 한참 가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뒤돌아 와 이정표를 확인하고 찾아오니 이렇게 늦었다는 해명이었습니다. 

지나고보니 이 또한 새벽길의 은혜로운 체험으로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새벽 어둔 길의 헤드랜턴의 불빛의 고마움을 몸소 체험한 이들은, 
어둔 세상에 빛처럼, 빛의 자녀들이 되어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잠언의 말씀처럼,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사람과 공연히 다투지도 않을 것이고, 
악한 이가 잘되는 것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 복을 내리시며 가련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세상의 빛'이 되어, '빛의 자녀들'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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