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3 조회수1,046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9월 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My mother and my brothers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act on it.
(Lk.8,21)
 
 
제1독서 잠언 21,1-6.10-13
복음 루카 8,19-21
 

언젠가 어떤 신부님의 차를 얻어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부주의로 다른 차와 부딪힐 뻔한 것입니다. 정말로 간발의 차이로 사고를 모면했지요. 그 차의 운전사도 크게 놀랐는지 쫓아와서 창문을 내리고 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점잖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차 운전수는 그 정도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겠는지 계속해서 옆으로 차를 붙으면서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만의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 역시 차선을 바꿔 들어오려는 신부님 차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런 위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니까요.

이제는 계속해서 욕을 해대는 운전수에 대해 저 역시 짜증이 나고 화가 나더군요. 그런데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허어, 저 친구가 나를 최고로 여기나봐. 자기 갈 길도 가지 않고 계속해서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잖아.”

순간 제 기분도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긴 굳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필요가 없지요. 차의 창문만 올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요. 괜히 불편한 마음을 만들 필요 없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을 밝게 만드는 것, 이 순간에 가장 필요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피한다고 해도 어느 곳에선가 또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잘 될 거야.’라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간직한 태도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커다란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을 우리에게 늘 주십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누구나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만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주님의 울타리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 곧 주님 안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아닌 세상의 것들에만 희망을 두려고 합니다. 그 세상의 것, 물질적인 것들만 채우려고 애를 쓰지요.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희망을 얻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금세 절망에 빠지고 좌절해서 쓰러지고 말게 됩니다.

희망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데스카).


 

무엇이 옳을까요?

제 친구 중에 융통성이 없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항상 원리 원칙을 내세우는 친구이지요. 그래서 늘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 친구가 거의 이기고 또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이 친구를 포함해서 몇몇 친구들이 유럽을 함께 여행 갔다가 어느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 저녁이었고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식사를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자리를 찾아 이곳 중국식당을 찾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한참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는데 한 친구의 입에서 철수세미 조각이 나온 것입니다. 기분이 나빴지만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냥 식사를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융통성 없이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친구가 앞에 나서서 화를 내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식사를 그만하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또한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서 배고픈 토요일 저녁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참 피곤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냥 종업원을 불러서 당신들이 실수했으니 빨리 새로운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왜 지배인을 부르고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요?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원리원칙일까요? 아니면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친구도 또한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친구도 역시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이든 상관없이 다른 이를 부정하고 거부할 때, 주님의 사랑은 희미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모든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셨던 주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넓은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