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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이 실천일 수밖에 없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7 조회수1,188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6주일


<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


복음: 마태오 21,28-32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카라바죠(Caravaggio) 작, (1606), 제노바 롯소궁전


     < 믿음이 실천일 수밖에 없는 이유 >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죠. 아들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며 날만 새면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대접하느라 돈을 낭비하는 것을 예사로 알았습니다.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을 보고 타일렀습니다.

얘야, 너도 이제 집안일을 돌 볼 생각을 하거라. 어째서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돌아다닌단 말이냐?”

아버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두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 친구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

그건 그렇지, 하지만 친구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웃는 얼굴로 어울리는 친구는 많아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드문 법이니까.... 혹시 네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너에게 받는 것에 재미를 들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냐?”

아버지는 제가 아직 어린애인 줄 아시는군요. 제 친구들은 모두 진실한 친구들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친구를 사귐에 참으로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이 애비가 시험해 보아도 되겠느냐?”

아이 참, 아버지! 아버지는 평소에 친구가 많지 않으셔서 저희들의 우정을 이해하실 수가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좋습니다. 이 기회에 저희 친구들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약속한 아버지는 그날 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거적에 쌌습니다. 그리고 지게에 지게하고 맨 먼저 아들과 가장 친하다는 친구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들은 친구 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보게 실은 내가 조금 전에 실수를 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여기 시체를 가지고 왔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좀 도와주게.”

뭐라고! 시체를 가지고 왔다고?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내 집에서 냉큼 사라지게.”

아들은 이렇게 가까운 친구의 집을 연달아 찾아가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두 다 냉정하게 거절만 당한 것입니다.

, 이번에는 내 친구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두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 갔습니다. 사정을 이야기 하자 아버지의 친구는 두 사람을 집안으로 안내 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 것이네. 이 시체를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저 나무 밑에 내려놓고, 자네는 내 옷으로 갈아입게나. 그리고 수습책을 함께 생각해 보세.”

아버지의 친구는 거적에 쌓인 것을 번쩍 둘러메고 자기 집 안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씀 하셨습니다.

친구여! 미안하네. 그 거적에 쌓인 것은 시체가 아니라 돼지고기라네. 내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네 그려!”

뭐야? 에이 짓궂은 친구 같으니!”

, 우리 돼지고기 안주해서 술이나 싫건 마시세!”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을 것이다. 친구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요, 친구를 날마다 만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많으나 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라. 그것은 참 된 우정을 나눈 자 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 현석 김형용 다음 블로그, 급난지붕(急難之朋)]

   

술자리에서 잔을 부딪치며 하는 구호 중에 한 사람이 대표로 은생은~!”이라고 하면 모두가 잔을 부딪치며 만남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 인생은 만남입니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 온전히 사람이 되고 온전히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만약 이 일생동안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삶이 되어버립니다. 가리옷 유다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과연 진정으로 만났을까요?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참된 우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가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아들이 나옵니다. 첫째 아들은 처음에 아버지가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고 하는데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바로 말로만 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은 둘째가 아닌 첫째임을 알려주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믿음과 연관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여기서 믿음은 곧 실천과 직결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말로는 한다고 하면서도 실천은 하지 않는 이들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믿음만으로란 기치를 들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는 처음에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제외시켰었습니다. 물론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성경에 넣기는 하였지만 믿음과 실천은 굳이 공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동이 아니더라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받았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곧 받아들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당신은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은 당신 안에 하느님을 잉태하게 함으로써 당신이 인간임에도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곧 자신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만남이 참으로 나를 변화시키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곧 실천인 것입니다.

   

이번 복자품을 받으신 124위의 순교자들 중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는 부부로 혼인을 하였지만 동정으로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권 데레사는 17세 때 일어난 신유박해로 온 집안이 풍파를 입어 의지할 데 없는 조카 하나와 한양으로 올라와 동정을 지키며 살아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인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혼인을 하지 않고 동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친척들의 권유로 20세에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혼인 날 밤에 자신의 신랑인 조숙 베드로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남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숙 베드로는 냉담 중이었습니다. 조숙 베드로도 박해받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주변의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신앙을 잊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혼인을 해서 반가웠는데 신부가 동정을 지키며 살자고 글을 써서 주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조숙 베드로에겐 그 순간 아내의 청을 받아주는 것은 곧 아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잃었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베드로에게 신앙의 열정이 다시 불붙었고 그날 아내의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지 않았던 베드로는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수차례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데레사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순교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자주 약해져 배교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실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며 남편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함께 참수형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순결한 부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 조숙 베드로-권천례 데레사 편]

   

조숙 베드로는 아내 권천례 데레사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면 권천례 데레사의 뜻을 따라주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뜻을 따라주지 않으면 진정으로 믿지도 진정으로 아내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받아들임은 곧 자신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동정을 지켜야만 했고 아내를 따라 신앙을 다시 찾아 증거의 삶을 살았으며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순교의 월계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변화되지 않았다면 진정 믿음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실천과 변화는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뜻대로 삶이 변화되었습니까?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직도 세상 것에 집착하고 겸손해지지 못하고 남을 판단하는 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그분을 만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참 믿음을 통한 만남은 내 삶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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