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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단(異端)과 이교(離敎) 의 차이
작성자김영범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8 조회수882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4년 전 새로 전입 간 본당에서 빠지지 않고 주일 미사를 보았지만, 신부님 수녀님 구역 반장님 말고는 일반 신자와의 친교가 거의 없이 지냈습니다.아니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 같은 신자를 가지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교(敎)신자' 라고 합니다. (離 : 귀신이름 리, 떠돌아다닐 리, 반벙어리 리) 

신자는 신자인데 '얼굴과 이름이 없는 신자', 즉 숨어 있는 신자라는 말입니다. 냉담자(쉬는 교우)와는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냉담자는 마음은 있으나 교회 자체를 멀리 하는 것...그러니까 열심한 신자와 쉬는 교우의 '중간'쯤 된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 불신(不信) : 계시 진리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동의하기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

* 이단(端) : 세례 받은 후 거룩한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                       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 (異 : 다를 이)

* 배교(背敎) :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

* 이교(敎) : 교황에게 순종하거나 그에게 속하는 교회 구성원들과 친교 맺기를 거부                       하 는 것 (離 : 귀신이름 이 )

                                                                ---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89 참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순히 ‘이단’(端 : 다른 종단)만 경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신앙 오류들로 부터의 경계가 필요 합니다.


  '미사' 열심히 보고, '기도'도 열심히 하긴 하는데, 저처럼 단체 활동이나 본당의 교우들과의 관계는 무조건 거부하게 되면 얼굴 없는 귀신 신자인 ‘이교’(敎: 얼굴 없는 종교란 뜻) 신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한편, 하느님의 존재를 자꾸 고의적으로 의심하면 ‘불신’(不信)자가 되고,  교리의 진리를 부정하면 ‘이단’(異端),  그리스도교 신앙 전부를 포기하면 ‘배교’(背敎)가 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조선 말 여러 박해기간 동안 배교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10,000명 넘게 순교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정도의 차이와 시각의 차이로 인해 그 구분이 불명확할지도 모릅니다. 계속적으로 진위논의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쨋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것들은 단지 '이단종교' 만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이나 배교, 또는 이교도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교구 성령 기도회에서 어느 지인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느낀 바가 커서, 나름 제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동안 10년 넘게 꾸준히 해 왔던 ‘묵주 기도’라든지 ‘렉시오 디비나’를 잠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따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명 못 할 정당한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그동안 너무 형식적으로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성심 상본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왜 변화되지 않고 있는지, 참된 변화를 막고 있는 트라우마는 무엇인지 매일 묵상하면서 예수님꼐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10년 넘게 매일 하루도 안빠지고 했던 기도와 셩경 묵상을 하루 아침에 갑자기 하지 않으니까 금단 현상이 마구 생기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고 땅이 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걸 보아서도 얼마나 제가 그동안 형식적으로 준성사를 대했는지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기도 안하면 벌 주는 그런 하느님 일까요? 성경 안읽으면 벌주는 그런 하느님 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하루를 꾹 참고 그렇게 넘기니까 오히려 마음에서 무엇인가 악마 같은 무거운 짐이 확 내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이 아니라 악마가 저에게 '매일같이' 2~3시간 어쩔때는 하루 종일  묵주기도와 렉시오 디비나를 시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그렇게 달콤했고, 렉시오 디비나 또한 보람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랫동안  지난 지금 그것은 저에게 무겁고 우울한 의무감만 심어 주었고, 집착증과 강박증만을 심어 주었습니다. 과거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을 때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이 도움이 되었지만,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변질된 율법’으로 인해 기득권의 횡포수단으로 이용된 것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은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 봤습니다. 본당의 어느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당의 날 행사'더군요... 미사 후에 어르신을 위한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가 있었고, 단체 회장을 만나 여러 교우들을 소개 받아 인사 했습니다. 국수를 먹고 술한잔씩 나누면서 초면에 어색하지만 분위기가 좋아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기초적으로 할 의무는 놔두고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은 분명히 ‘이웃 사랑’과 떨어뜨려서 설명이 불가하다고 가톨릭 교리는 여러 차례 말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도 내게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고 결국 아무도 누가 누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덩그러니 각자 자기 혼자, 자기 세상에서만 살아간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 사람 인(人)도 두 획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입니다. 획 하나만 없어도 있다면 그건 '사람인'(人) 자가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자일 수 있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닌 반드시 ‘타인’입니다. 

 

어쨌든 오랬동안 방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저는 본당의 여러 교우 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자 마자 신앙의 진수와 거기에서 나오는 진리를 느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태도는 거짓말장이가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교’(離敎: 반 벙어리, 떠돌아 다니는 종교 ), 즉 정당치 못하게 숨는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치부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숨기지 말고 드러냅시다. 자꾸 창피하다고 숨고, 비난과 모욕 받을 까봐 (트라우마) 숨으니까 없어도 될 문제가 자꾸 도사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오류가 있으면 '정면'으로 대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쓰러진 곳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평생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어떤 큰 사건, 사고로 인한 큰 충격은 지금에 와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비슷한 사진이나 그림이나 남의 사건)에도 내 자신에게 과거 내가 느꼈던 충격과 '똑같은 양'의 충격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트라우마라' 함-  

그러므로 여기서 무엇보다 여기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합다.!!! 필요하면 정신과 상담을 받든 신앙 상담을 받든, 나름대로의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될 수 있으면 평화로운 방법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옛날에 겪었던 비슷한 사건 사고가 닥쳐도 과거와는 대응 방법이 판이하게 다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 갈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해결 해야 할 고통을 회피하려고 아무리 여행을 다녀봐도 아무리 쇼핑을 다녀 보아도 아무리 승진을 하고 돈이 많아 져도

'그 고통'은 그대로 자기를 따라 다닙니다. '그 고통'이라는 그것을 내려 놓는 작업(대게, 트라우마 치유를 통해 해결)을 해야만 그 고통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한 기대를 추구할 밑바탕이 생기고 용기를 내어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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