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의미' 를 추구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작성자김영범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30 조회수885 추천수2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 "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

이런 종류의 질문들을 누구나 한번쯤은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답이 나오는 문제들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 쉽게 답을 내었어도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네 인생 행보에서 그 답은 수정되고 때론 오답으로 판명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찾게 되고 그 진리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불교'나 '유교'같은 훌륭한 종교나 철학이 있어서 백성들은 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라는 전혀 새로운 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19세기 말 무렵부터는 기존의 ‘성리학’이라는 유교 사상과 많은 사상적 충돌을 일으키면서 조금씩 교세를 넓혀가며 실질적인 '진리' 로써 백성들에게 전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 현재 아직 인구의 1/10 정도 밖에 안되는 교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 우리나라의 사상적 주류를 자신 있게 조선 말의 '성리학' 이라고 말할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대신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그리스도교' 또는 상당수의 '무교'가 5천만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제, 신뢰할 수 있는 여론 조사에서도 ‘신뢰도’ 와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모두 천주교가 1위를 차지 했습니다. 물론 불교나 유교를 폄회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로부터 유럽 국가들은 여러 가지 ‘철학’의 사조들이 많아서 인간 ‘사유’의 방법론이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우리나라는 그것을 ‘불교나 유교’가 담당 하였습니다.

무엇이 더 진리에 가까운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인간의 ‘사유’가 점점 실종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를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 단위로 돈으로 계산되고 한시가 급한 초고속 통신 시대에, ‘철학’을 하고 ‘공자왈 맹자왈’하는 것은 마치 바보들이나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그런 무익 한 것으로 이해 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이 시대가 인간 사유의 가치와 존엄성을 혐오하는지 느끼게 합니다. ‘윤리, 도덕’ 을 말하면  쓸모없는 자가 되어 버리고 정신 이상자로 오해 받습니다.

현대 철학이 인간의 정체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는 오히려 인간 보다는 ‘경제’, 가치보다는 ‘효울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한 관심을 애써 깍아 내리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가치가 아직 훼손되지는 않았지만, 지역을 가리지 않고 만연한 ‘악’이나 같은 민족 간의 극한 불목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종교’가 현재 인류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반성’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방법’에 대한 논의가 ‘목적’에 대한 논의보다 더 중요시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이룰 방법이 나쁘면 목적을 성취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러한 목적과 방법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 또한 더 이상 도움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과 ‘정의’를 따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그 둘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사랑’과 ‘정의’는 따로 떼어내는 순간 각각의 의미가 완전히 파괴됩니다.

 ‘사랑이란 말’과 ‘정의로운 행동’에 대하여 사람들은 한쪽 편을 들며 이러쿵 저러쿵 논쟁과 싸움이 많지만 그 노력에 비해 결실은 상처와 서로에 대한 입장 차이일 뿐이지 하나가 되는 과정에는 역행 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를 이룰 가장 좋은 길은 이성으로써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하여 내가 ‘사유’를 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가치입니다.

‘무엇 무엇’에 대하여 ‘누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유하고 추론하는 등의 행동들은 ‘진리’를 쉽게 만나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대상에 대하여 뚫어질 정도로 정면으로 대면하는 자세가 필요 합니다.

신앙이란 것도 우리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주님께 봉헌 할 때 비로소 얻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일상생활에서의 사건, 사고를 우리가 주변의 단순한 소문이나 몇 몆 뉴스만으로 제대로 이해 될 수 있는 실체가 절대 아닙니다.

뚫어지게 대상을 대면하고 나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내려 놓는다는 그 자체’ 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자연히 성령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채워주심을 우리 신앙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유’가 사라진 이 세상...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당당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것에 한 몫을 담당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불교의 ‘윤회론’ 에 대한 이성적 사유가 없는 ‘오해'입니다. 윤회론을 ‘다시 환생 하는 것’ 쯤으로 오해해서, 우울증을 견디다 못한 우리 국민이 너무도 쉽게 자살을 선택 합니다. 다음 생에 대한 막연한 환상적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윤회론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지극히 윤리적 사유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다른 생으로 환생 한다’는 이론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 생각으론 불교의 지도자들은 하루 빨리 ‘바람직한 윤회론’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장을 시급히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원인은 우리의 삶에서 ‘사유’가 사라진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대응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내가’ 또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정자들의 생각이나 회사 상사가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따라 ‘비위’를 맞추어 버립니다. 지금 정치권이 세월호 사건에 눈꼽 만큼이나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회사 상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 생각은 내 생각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세대는 사유가 ‘사라진’ 세상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사유에 대하여 내 사유가 잠식’ 당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남의 생각을 무시하고 내 생각만 주장하는 것은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나의 기본적 생각을 주춧돌로 놓지 않는 태도... 이것은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딜 가도 ‘나’의 모습은 없습니다. 먼 훗날 세상과 하직 할 때가 되면 옥황상제가 “네 이름은 없다” 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성의 사유를 팔아먹은 죄로 지옥에서 아무 의미없는 일에 투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자기 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어서 빨리 참 나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살펴야 합니다. 영성 신학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도 ‘하느님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상위’ 영성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실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사랑을 허락하시고 그 결실을 모두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을 대상인 바로 ‘나 자신’ 찾기 부터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참되든 거짓 되든 간에, 일단 자기로 부터의 통로가 확보되면, 비로소 나를 버리고, 모로 가든 지름길로 가든 ‘이웃과 하느님’께 갈수 있는 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유’는 우리를 의미 충만한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믿음’ 을 전재로 하지 않는 것은 ‘오만’ 이고,

              ‘이성’ 을  사용 하지 않는 것은 ‘태만’ 이다. ”

                                                                                                - 성 안셀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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