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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를 버린 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04 조회수1,292 추천수1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7주일


<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복음: 마태오 21,33-43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카라바죠(Caravaggio) 작, (1606), 제노바 롯소궁전


     < "주를 버린 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

            

   우리나라 정식 첫 세례자는 1784년 북경 사신으로 갔다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주교와 사제직을 맡아가며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 보고 배우고 온 것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해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의 신앙을 전파했던 한국 초대교회 창설자들은 몇몇 유생의 고발로 사형과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북경주교의 명령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대놓고 제사를 거부하여 1791년 그들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은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이 돼서야 겨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여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집을 옮겨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는데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발각되면 그를 모시던 회장들이 사제복장을 하고 관아에 끌려가 대신 순교를 함으로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3명의 회장들이 순교를 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강완숙 골롬바가 6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주 신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강완숙 골롬바까지 잡혀가 문초를 당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만 없어지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혀가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이 생명을 부지하여 천주교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날 밤, 주 신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양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와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내가 주문모 신부요!’하고 자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때가 1801419일이니 주문모 신부는 약 6년간 조선교회를 위해 일하셨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순교자가 됩니다. 그 후 33년 동안 사제가 없는 암흑의 신앙생활을 하고 모진 박해가 있었음에도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조: 김길수 강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저는 지금 한국교회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써 순교자들의 삶에 비해 저의 삶을 비추어보며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 결혼도 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의 행복도 알고 허무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에서 편하게(?) 사목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이 그의 발이 떨어지지 않게 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모진 고문과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맡겼는데 소작인들은 그것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도조를 받으러 온 하인들뿐 아니라 주인의 외아들까지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떻게 돌아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고 세상 것을 추구하느라고 하느님을 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도조, 즉 십일조도 내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 주인의 아드님이 우리 안에 말씀과 성체로 들어오셨다가 우리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 밑에서 그리스도의 뜻은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가 바로 하늘나라의 행복과 연결됨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면 결국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문모 신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순교의 길을 택했던 것은 이 세상이 싫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 , 하느님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적인 행복이 아닌 마음의 평화를 선택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압록강을 건너서 평생 불편한 마음으로 사느니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편한 마음으로 죽겠다는 것이 순교의 정신입니다. 순교의 목적도 결국엔 행복에 있었던 것입니다.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 중에 많은 지식층들은 천주교를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지고 있던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민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킵니다. 서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은 쉽게 뽑히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우리나라 가톨릭도 건강한 모습으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유층이 훨씬 많이 성당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서민 중 이도기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던 이도기는 서울로 올라와 김범우 등을 만나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기쁨의 삶을 삽니다.

대놓고 신앙생활을 하고 교리를 전파하니 곧 잡혀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논어 맹자를 뛰어넘는 지식으로 반박하니 그의 예지에 심문하던 공주부윤이 이도기를 놓아줄 방법을 찾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밤에 감옥 문을 열어놓고 도망치면 죄수가 도망쳤습니다. 곧 잡겠습니다라고 보고하고는 안 잡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런 명령을 받은 포졸들은 문을 열어놓고 도망치기를 바라며 슬쩍 자리를 피합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보니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문을 아예 활짝 열어놓고 다른 곳으로 갔다 오니 여전히 목석처럼 앉아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이 새고 포졸들은 아이고 이 답답한 친구야, 당신이 천주교를 믿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려면 눈치가 있어야지. 그러다가 매 맞아 죽기 알맞소하며 안타까워합니다.

내가 매맞아 죽을지 병들어 죽을지 굶어 죽을지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요. 내가 어떻게 죽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내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그렇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 뜻을 따를 때 솟아오르는 양심의 기쁨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포기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옥중생활은 너무나도 혹독하여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입을 옷과 음식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이도기에게는 부인이 매번 그런 수발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이도기가 부인을 불러서 말합니다.

부인, 나 때문에 번거로움이 많소. 이제 괘념 말고 면회 오지 마시오.”

부인은 매우 난감합니다. 춥고 배고픔에 죽어가는 남편을 보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살짝 와서 옷과 음식을 넣어놓고 갑니다. 어느 날 다시 이도기가 아내를 부릅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옷자락을 들쳐 상처를 보여줍니다. 먼저 맞은 상처는 썩어가고 새로 생긴 상처는 피가 흐르는데 뼈가 으깨어져서 그 살갗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부인 보시오. 나도 사람인데 이 상처가 어찌 아프지 않겠소.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은 고통을 잊을 수 있소. 그런데 부인이 오시면 나 또한 어찌 사랑하는 내 아내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당신을 바라보면 아내를 보는 기쁨은 누리지만 이 상처의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으니 면회 오지 마시오.”

부인이 비로소 남편의 의도를 깨닫고 음식과 옷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한 달이 지난 뒤 포졸이 부인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부인이 슬피 우니 포졸이 부인을 위로하는 말을 합니다.

부인,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 남편이 죽던 그 밤에 찬란한 빛이 당신 남편의 시신에 어리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참조: 하늘로 가는 나그네]

   

영국의 격언 중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주를 버린 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그렇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세상을 버리던가, 아니면 세상을 얻으려 마음의 평화를 버리던 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마음의 평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임을 믿는다면, 마음의 평화를 잃는 것이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고 결국 세상 모든 것까지 잃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도기는 아내의 애정과 세상의 배부름과 따뜻함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자기 마음의 평화만을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내 또한 자신의 삶을 따라 순교의 길을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순교는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순교는 양심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만약 양심의 평화를 잃는다면 불안한 마음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이 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은 끊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두 행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만약 양심의 평화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순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교의 피는 또한 주위를 깨끗하게 하여 더 많은 이가 구원의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이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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