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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같은 행위, 다른 본성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08 조회수922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복음: 루카 11,5-13





구세주


 모스크바 화파 작, (1330 경)

 


   < 같은 행위, 다른 본성 >


  몇 년 전부터 술이나 고기를 먹거나 햇빛을 많이 쐬면 얼굴에 붉은 반점들이 돋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가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에 나갈 때는 얼굴이 희게 되는 선크림을 바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크림을 지우고 나면 그 붉게 올라온 것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어쩌면 위선이란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일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화장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화장은 자기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천연두 등의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도 했고, 서커스를 위해 우스운 화장을 하는가 하면 전쟁터에서 상대에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도 우리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려고 말과 행동에 화장을 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변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구원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다시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갈라티아인들에게 잘못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옛 계약(구약)이었고 이는 그리스도와 맺은 새로운 계약(신약)으로 파기되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의 희생 공로가 무의미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가 내준 보속을 하지 않았다고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의미 없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보속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죄가 용서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약간은 흥분된 듯 이렇게 말합니다.

,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바오로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닌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듯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란 바리사이처럼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여겨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구원은 무화과 잎이 아닌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죽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 일부 신학자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한 번 구원받으면 그만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고도 계속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주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이 말하는 행동은 진정으로 믿는다면 행동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야고보가 왜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가톨릭이 행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율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지녔느냐의 판단이 결국은 행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도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 행동이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알려면 열매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도 아니면서 겉으로만 그런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위선자요 율법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신앙 안에서도 이런 잘못된 사고가 많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 봉사를 많이 한다면, 혹은 미사나 기도를 많이 한다면, 혹은 선행이나 자선을 많이 한다면 하느님께서 더 즐겨 보아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가장 많이 했던 이들이 바리사이들입니다. 착함이란 나의 존재가 변하여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했다고 보상이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의도로 했다면 이는 위선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는 자신들이 한 선행과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도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지며 교만해 졌다가 하느님께로부터 큰 벌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받아들이면 자신도 모르게 선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신의 본질과 벗어나 위선적일 수 있고 반면 본질에서 나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맷돌질을 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지며, 같이 밭을 갈아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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