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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더 주었다고 믿는 것이 율법주의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09 조회수987 추천수1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복음: 루카 11,15-26






묵주의 성모


카라바죠(Caravaggio) 작, (1607), 빈 미술사 박물관



     < 내가 더 주었다고 믿는 것이 율법주의 >

 

한나라 5대왕 무제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주매진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베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매진은 나무를 하면서도 글 읽기를 좋아하여 길을 가면서도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의 무능력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내는 함께 나무를 이고 가면서 남편을 책망했습니다.

천한 나무꾼의 신세로 길에서 글을 읽고 다니면 남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으니 제발 그만 좀 하시죠.”

그러나 주매진은 들은 척도 않고 더욱 높은 소리로 읽으니 아내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남편을 떠나려했습니다. 반면 남편은 웃으면서 50만 되면 크게 성공할 테니 몇 년 만 참으로 될 것이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러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며 욕을 하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주매진은 여전히 나무를 팔면서 다니다가 그 해 인부로 뽑혀서 수도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좋은 기회가 생겨 임금에게 글을 지어 바쳤습니다. 임금은 그의 글 솜씨를 보고는 바로 주매진의 고향 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가 말 탄 경호무사들과 백여 대의 수행마차를 거느리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고향으로 입성하니 사람들은 다 그 귀공자가 누구인지 모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새 군수의 높은 관모를 쓰고 비단 관복을 입은 위엄은 당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나무 짐을 지고 다니던 주매진이 새 군수가 되었음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매진을 버린 여인도 새 남편과 함께 길을 쓸러 나왔다가 그를 보고는 부끄러워 도망쳐버렸습니다. 아닌가? 모든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매진을 버린 여인은 남편과 같이 길을 닦으러 나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부끄러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안 주매진은 그 부부를 정중히 모시고 태수관사의 정원 끝에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아내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을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면에는 자신이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하는데 그것에 합당한 몫을 상대고 못해주고 있다고 믿을 때 서운해 하고 화를 내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율법주의자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란 자신이 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의 위치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열심히 살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옛 계약, 즉 구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계약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약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폐지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누구도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행위로는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그 오랜 시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의 시대가 오는데, 행위가 아니라 예수, 즉 구원하시는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신약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음으로써 내 존재가 변화되어 구원되는 것이 신약인 것입니다. 이 신약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사실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부수적인 행위들은 불필요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특징은 내가 이러저러한 계명을 지키고 공을 세웠으니 합당한 보상을 주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하여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공로를 감소시키며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바오로가 걱정하는 것은 신약을 받아들인 이들이 다시 구약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으로는 구원이 불가합니다. 나의 행위가 구원을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하니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그 행위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을 사는 이들의 특징은 감사입니다. 나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았기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도 없고 항상 기쁘고 감사하여 결코 구약으로는 되돌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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