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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완덕의 길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15 조회수1,688 추천수13 반대(0) 신고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 11,42-46





완덕의 길


 

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데레사 성녀가 걸었던 완덕의 삶을 본받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시기를 기도합니다.

1515 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21살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철저한 고행과 관상으로 참된 수도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동료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관상 수도회를 지켜나갔습니다. 1582년 알바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1622년 시성 되셨습니다.


 

데레사 성녀의 상본을 보면 성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항상 주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데레사는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수녀원 2층을 올라가는 층계에서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소년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 때 데레사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데레사야!”.‘데레사’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대답한 것을 통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데레사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그랬더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데레사의 예수야!”데레사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과연 우리는‘예수님의 아무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아무개의 예수야!’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말합니다.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겠나이다.”하면서 수덕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님, 저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면서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살라망카 외곽의 ‘알바 데 또르메스’수도원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녀의 심장과 팔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10월15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데레사 성녀께서 수녀들에게 타이르던 말씀을 함께 묵상함으로써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기름진 땅이라도 아니 가꾸면 가시와 엉겅퀴가 날 따름이니 사람의 정신도 이와 같으니라. 영성적인 일들을 항상 좋게 말할지니 이를 테면, 수도자 사제, 은수자니라.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매양 말을 적게 하라. 하는 일, 대하는 일마다 조심성을 가져라. 언제나, 특히 하찮은 일에 마구 우기지 마라. 누구에게나 알맞은 기쁨으로써 말하라. 어떤 일에든지 조롱을 하지 말라. 신중과 겸손과 스스로 부끄럼 없이 남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서 기꺼워하는 이와 기꺼워하고 슬퍼하는 이와 슬퍼할지니 결국 모든 이를 얻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변명을 하지 마라.”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으로 충분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진보를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다른 것들도 말해 보렵니다. 그저 바라옵기는 주께서 내가 하려는 일 전체에 당신 손을 펴 주시어 거룩하신 그 뜻에 맞게 해주십사 할 따름입니다. 비록 일이야 나 자신처럼 하찮은 것이지마는 언제나 주님의 뜻을 좇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인 것입니다.”


 

성인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을 그린 상본을 쳐다보고 자기도 모르게 감동되어 자기의 냉담한 처지를 깊이 부끄럽게 여겨 새 생활을 시작하였고, 열심히 읽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 비추어 자기 영혼의 한심스러운 처지를 발견하고 갑절의 열심을 분발시켜야 되겠다고 통감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영적(靈的)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고해 사제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내 생활은 내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의 내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보다 주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 꾸짖음 받아 행복합니다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했거늘 그들은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내적인 의미에 최대의 중요성을 두어야 하겠지만 외적인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규정과 외적인 관례를 모두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그에 걸 맞는 처신을 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그분의 충고를 알아듣고 받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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