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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15 조회수1,291 추천수13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Lk.11,44)
 
 
제1독서 갈라 5,18-25
복음 루카 11,42-46
 

언젠가 바닷가에 깔린 자갈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 자갈들의 모양이 다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다보면 똑같은 것도 있을 법한데, 많이 비슷해도 어느 하나 완전히 똑같은 것이 없더군요. 그런데 같은 장소와 같은 날씨 등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각기 구르고 부딪히면서 어느 것 하나 겹치지 않는 개성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 다른 개성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단죄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다름은 당연한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과 장소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다름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자갈도 이런데 하물며 복잡하게 창조하신 인간의 다름은 어떨까요? 더욱 더 당연한 것이며,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이 다름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예외도 두지 않고 똑같이 율법을 지켜야 했으며, 자신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커다란 죄인으로 단죄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기 보다는 철저히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판단하고 단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실 리가 없지요. 철저히 율법에 맞춰 생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겉으로 보이기에만 급급한 위선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을 발견하십니다. 무덤 밖으로는 아름답게 꾸며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시체가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듯이, 위선자들이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다고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실천했고, 회당 앞자리에 앉아 자신이 열심함을 드러내려고만 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무게 잡고 다니면서 인사 받는 것에 익숙했지요. 그런데 정작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하느님 사랑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짐짓 의로운 척 하기 때문에, 드러내어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사람들의 윗자리에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정작 자신이 받는 판단과 단죄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에게는 관대했고, 남들에게는 엄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도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안은 곪을 대로 곪아서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과 속이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 이 삶만이 내 안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맹세는 말에 지나지 않고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버틀러).


 

우리 교육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을 보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기준으로 볼 때에 너무나 어린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20세에 왕위에 올라 20대 초반에 세계를 재패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20대에 이미 자신의 실력을 세상에 널리 알렸는데, 이보다 훨씬 빠른 5세부터 세상을 돌며 천재성을 세상에 드러냈던 모차르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없을까요? 허균의 누이였던 허난설헌의 시들은 중국의 문단까지 매료시켰었지요. 허난설헌이 스물여섯에 죽었으니, 놀라운 시들은 스무 살 전후에 쓴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남이섬의 주인공인 남이 장군은 10대에 무과에 합격한 뒤, 20대에 북방전선에 서서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교육을 훨씬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이것도 부족해서 대학에서 4년을 다닙니다.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옛날과 같은 세상을 움직이는 위인이 없다는 생각은 저만의 느낌인 것일까요? 혹시 지금의 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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