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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기로운 삶 -하늘 나라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02 조회수840 추천수1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1.2 주일 위령의 날, 지혜4,7-15 사도6,3-9 마태25,1-13

                                      
슬기로운 삶  -하늘 나라의 삶-

제가 묘지를 찾을 때마다 우선 살피는 것은 묘비명입니다. 
묘비명에 따라 더욱 친근하게 와 닿는 죽은 분들입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순례할 때 눈에 띄는 것은 
마을마다 중심에 있는 성당이요 
마을 주변에 약간 떨어져 있는 성당묘지였습니다. 
또 어느 곳에는 성당 바로 옆 마당이 묘지였습니다. 

산자들과 죽은자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듯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화답송을 보는 순간 떠오른 묘비명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의 부탁으로 선정해 드린 시편 구절의 묘비명인데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묘지를 찾는 산 자들에게도 마음에 깊은 평화와 위로를 주는 묘비명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의 하늘 나라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의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영원을 사는 것이 
죽음에 대한 최고의 답이자 슬기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 '슬기로운 삶-하늘 나라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십시오.

어제는 모든 성인들(all saints)의 날이었고, 
오늘 11.2일은 위령(all souls)의 날입니다. 
괄호 안의 영어단어가 분명해서 좋습니다. 

대부분 죽은 분들이 위 양편에 속해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어제와 오늘입니다.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죽음입니다. 
하여 옛 사막의 교부들이나 베네딕도 성인은 
'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강조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탐욕이나 허영의 환상은 걷혀  
마음도 순수해지고 죽음에 초연할 수 있으니 
이런 이가 의인입니다.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의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죽음과 더불어 염두에 둬워야 할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잘 살았느냐를 늘 염두에 둘 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늘 주님과 함께 있으십시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 될 것을 약속하신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이십니다.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바로 늘 곁에 계신 주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무지하여, 탐욕에 눈이 가려 가까이 계신 주님을 잊고 지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악의 마력은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합니다. 
바로 주님을 잊을 때 자초하는 화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악은 이성을 변질시키지 못하고 거짓은 영혼을 기만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참 평화와 안정에 기쁨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삼 주님과 함께 할 때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 늘 새로운 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늘 깨어 있으십시오.

늘 기름을 준비하여 깨어있다가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다섯처녀들입니다. 
신랑이 상징하는바 주님이요 죽음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오늘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성녀 젤투르다 역시 
죽음을 통해 오시는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때의 임종어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종인지요. 
과연 우리는 '영혼의 등'에 믿음, 희망, 사랑의 기름을 가득 채워 놓고,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지요?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이미 닫힌 죽음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라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지요. 

하여 주님은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위령의 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사십시오.
2.늘 주님과 함께 있으십시오.
3.늘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어, 
일찍이 세례의 은총을 받은 그들이 영원한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2014.11.2 주일 위령의 날, 지혜4,7-15 사도6,3-9 마태25,1-13

                                      
슬기로운 삶  -하늘 나라의 삶-


제가 묘지를 찾을 때마다 우선 살피는 것은 묘비명입니다. 
묘비명에 따라 더욱 친근하게 와 닿는 죽은 분들입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순례할 때 눈에 띄는 것은 
마을마다 중심에 있는 성당이요 마을 주변에 약간 떨어져 있는 성당묘지였습니다. 
또 어느 곳에는 성당 바로 옆 마당이 묘지였습니다. 
산자들과 죽은자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듯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화답송을 보는 순간 떠오른 묘비명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의 부탁으로 선정해 드린 시편 구절의 묘비명인데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묘지를 찾는 산 자들에게도 마음에 깊은 평화와 위로를 주는 묘비명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의 하늘 나라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의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영원을 사는 것이 
죽음에 대한 최고의 답이자 슬기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 '슬기로운 삶-하늘 나라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십시오.

어제는 모든 성인들(all saints)의 날이었고, 오늘 11.2일은 위령(all souls)의 날입니다. 
괄호 안의 영어단어가 분명해서 좋습니다. 

대부분 죽은 분들이 위 양편에 속해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어제와 오늘입니다.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죽음입니다. 
하여 옛 사막의 교부들이나 베네딕도 성인은 '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강조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탐욕이나 허영의 환상은 걷혀  마음도 순수해지고 죽음에 초연할 수 있으니 이런 이가 의인입니다.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의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죽음과 더불어 염두에 둬워야 할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잘 살았느냐를 늘 염두에 둘 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늘 주님과 함께 있으십시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 될 것을 약속하신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이십니다.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바로 늘 곁에 계신 주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무지하여, 탐욕에 눈이 가려 가까이 계신 주님을 잊고 지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악의 마력은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합니다. 
바로 주님을 잊을 때 자초하는 화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악은 이성을 변질시키지 못하고 거짓은 영혼을 기만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참 평화와 안정에 기쁨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삼 주님과 함께 할 때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 늘 새로운 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늘 깨어 있으십시오.

늘 기름을 준비하여 깨어있다가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다섯처녀들입니다. 
신랑이 상징하는바 주님이요 죽음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오늘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성녀 젤투르다 역시 죽음을 통해 오시는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때의 임종어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종인지요. 
과연 우리는 '영혼의 등'에 믿음, 희망, 사랑의 기름을 가득 채워 놓고,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지요?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이미 닫힌 죽음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라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지요. 

하여 주님은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위령의 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사십시오.
2.늘 주님과 함께 있으십시오.
3.늘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어, 
일찍이 세례의 은총을 받은 그들이 영원한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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