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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의 여정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06 조회수1,256 추천수1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1.6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3,3-8ㄱ 루카15,1-1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아갈수록 자유로워지니 깨달음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내적자유와 기쁨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아 가면서 마음도 새로워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이라면 
내적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무가치한, 무의미한 삶입니다. 
구원과 직결된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그대로 은총이요 구원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마지막 구절입니다. 

제3자가 편지체로 시골신부의 죽음을 전하는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그는 자기 손을 제 손 위에 얹으며 제 귀를 자기 입에 가까이 갖다 대라고 
분명한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몹시 느리기는 하지마는 분명한 말소리로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가 은총인 걸"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아주 정확히 여기에 옮겨 적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숨을 거둔 것 같이 생각됩니다.-

마지막 임종어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깨달음의 전 삶을 요약하는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묘비명으로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크나큰 깨달음과 더불어 선종한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의 시골신부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은 자를 각자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예수님도, 바오로도 위대한 각자입니다. 

바오로의 깨달음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깨달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불가의 깨달음과 다른 분기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은 바로 주님과 사랑의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만나 깨달음이 깊어갈 때 세상 모두가 덧없어 지니, 
비로소 세상 모두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보다 자유로운 사람, 부요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인간이 물음이라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처럼 깨달음의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하느님의 마음을 즉시 이해합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예수님은 곧바로 아버지를 만나 깨달은 분입니다. 

바로 복음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자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쁨 가득한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못박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기쁨을 확신에 넘쳐 고백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바오로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깨달음에 이를 때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로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매일미사보다 깨달음의 여정에 좋은 길잡이는, 이정표는 없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시편35,10). 

아멘.



2014.11.6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3,3-8ㄱ 루카15,1-10

                                    
깨달음의 여정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아갈수록 자유로워지니 깨달음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내적자유와 기쁨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아 가면서 마음도 새로워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이라면 내적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무가치한, 무의미한 삶입니다. 
원과 직결된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그대로 은총이요 구원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마지막 구절입니다. 
제3자가 편지체로 시골신부의 죽음을 전하는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그는 자기 손을 제 손 위에 얹으며 
제 귀를 자기 입에 가까이 갖다 대라고 분명한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몹시 느리기는 하지마는 분명한 말소리로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가 은총인 걸"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아주 정확히 여기에 옮겨 적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숨을 거둔 것 같이 생각됩니다.-

마지막 임종어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깨달음의 전 삶을 요약하는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묘비명으로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크나큰 깨달음과 더불어 선종한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의 시골신부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은 자를 각자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예수님도, 바오로도 위대한 각자입니다. 

바오로의 깨달음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깨달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불가의 깨달음과 다른 분기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님과의 만남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은 바로 주님과 사랑의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만나 깨달음이 깊어갈 때 세상 모두가 덧없어 지니, 비로소 세상 모두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보다 자유로운 사람, 부요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인간이 물음이라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처럼 깨달음의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하느님의 마음을 즉시 이해합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예수님은 곧바로 아버지를 만나 깨달은 분입니다. 

바로 복음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자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쁨 가득한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못박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기쁨을 확신에 넘쳐 고백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바오로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깨달음에 이를 때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로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매일미사보다 깨달음의 여정에 좋은 길잡이는, 이정표는 없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5,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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