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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2014. 11. 9)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07 조회수626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2014. 11. 9.

요한 2, 13-2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성전 뜰에는 성전에 제물로 바쳐야 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환전상은 외국의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 주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물들을 내어 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고,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의 상인들은 성전의 사제들과 결탁한 자들입니다. 사제들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고, 성전 뜰의 상인들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상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런 행패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숫자적으로도 우세합니다. 열두 제자들이 가세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런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와 양을 내어 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 버리는데, 그들이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그 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은 그 사건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에 있었던 것으로 보도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을 환영하던 군중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군중이 성전에까지 가서 상인들과 충돌한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 사제들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교기득권층은 예수님을 더 이상 살려 둘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체포되고,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이야기는 예수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이야기를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성전에서 일어난 소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씌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기도의 집강도의 소굴은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이사 56,7; 예레 7,11) 안에 있는 표현입니다. 복음서들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예수님이 정화하여 성전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살려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 공생활의 시초에 옮겨다 놓은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유대교 성전 원래의 의미, 곧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되찾는 데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한 분이신 야훼, 하나인 이스라엘, 하나인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인 성전이라는 뜻으로 지방에는 회당만 두고,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 두었습니다. 그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하였고,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의 권위와 우월감도 높아졌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의미는 희석되고, 사제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그들이 잇속을 챙기는 성전이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과시하며, 자기의 잇속을 챙깁니다. 사람이 돋보이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의미를 왜곡한 유대교를 비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팔아서 사람들이 행세하고, 이권을 챙기는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돋보이고, 인간이 권위를 지니는 곳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의 사제들이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수입을 올리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는 헌신(獻身)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단어는 그분이 부활하신 후, 신앙인들이 성찬을 거행하면서 즐겨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이제 예루살렘의 성전건물 안에 계시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거행하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성사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신앙을 쇄신하였습니다. 그분의 노력은 십자가의 실패로 끝났지만, 그 후 교회 안에 나타난 성체성사와 그 성사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신앙인들의 삶 안에 그 쇄신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하느님을 빙자하여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성체성사는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몸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사람이 되라는 성사(聖事)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것은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재물을 많이 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와 불행을 예사로 보며, 그들의 불행을 딛고서라도 우리 자신은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그런 우리의 통념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방식,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그분의 삶을 배워 그분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하느님의 삶을 충실히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발족한 것도 예수님의 방식을 배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 곧 내어주고 쏟는 실천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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