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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1.20 목/ 나를 보며 우시는 예수님/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20 조회수1,896 추천수6 반대(0) 신고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루카 19,41-44(14.11.20)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나를 보며 우시는 예수님
 

 
          쌀쌀하지만 청명한 하늘이 영혼 한켠을 돌아보도록 초대하는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아 당할 재앙을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결국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된다. 43절부터 ‘그리고’(κα i)란 접속사가 5번

    나오면서 파멸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고 탄식하신다.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는 데 대한 쓰라림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19,44)이었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자.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예루살렘은 내 뜻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과

    하느님의 얼을 지닌 형제자매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19,37-38) 우리가 세례나 서약을

    통하여 하느님께 드린 약속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하며 찬미하는

    제자들의 몸짓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말씀을 멀리 하고, 내가 주인인양

    착각하며, 다른 이들의 재판관처럼 살아가고, 희망이신 주님을 외면하고 불평불만과

    절망 속에 살아가며, 죄에 무감각한 채 살곤 한다.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것은

    이런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수난을 회상하고, 자기 영혼의 어둠을 바라보며

    평생을 눈물에 젖어 살았다. 우리도 죄 많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시는 당신을 보고, 통곡하던

    예루살렘 여인들을 보며,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루카 23,28)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먼저 슬퍼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이다.

    이제 평화를 간직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며, 고통과 시련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견디고, 경직된 모습을 버리고 관대히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예루살렘은 또한 하느님의 선과 얼을 지닌 형제자매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선물 자체로서 예루살렘에 다가가셨다. 그분은 평화 자체로서

    자신을 배척하고 죄 중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달려가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을 장터로 바꿔버렸다. 눈물에 젖어 분노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자매들의 얼굴이다. 예수님의 얼이 숨 쉬는 터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 왜 그토록 우리는 형제자매들의 좋은 점을

    칭찬하는데 인색한가? 인색한 나의 태도가 바로 주님의 집을 장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뜻이며, 형제

    자매들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들 안에 오시는 하느님의

    선과 선물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지금 내 영혼은 ‘기도의 집’인가 ‘강도의 소굴’인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19,44)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보며 오늘도 주님은 울고

    계신다. ‘찾아오신 때’는 구원의 때와 심판의 때를 뜻한다. 곧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 오신다는 뜻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는 바로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나누지 않고, 남의

    약점과 결점을 들추고 헐뜯는 사람에게 주님의 오심은 심판을 뜻한다.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은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나는 오늘도 예수님께서 나를 보며 우시도록 할 것인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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