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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원한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22 조회수947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1.22. 토요일(뉴튼수도원 12일째),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260) 기념일 
요한묵11,4-12 루카20,27-4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영원한 삶

오늘은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진정 살아있다 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아있다하나 진정 살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 진리를 알 때 진정 살아있는 삶이요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원한 삶의 실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이 경지를 체험하며 사는 이들이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가 이런 영원한 생명의 살아있는 표지입니다. 
아니 수도자뿐 아니라 
세례를 통해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 역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달아 사는 자 얼마나 될까요? 
이 진리를 깨닫고 살아야 죽음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오늘 복음이 고맙습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 몸이 내가 아닙니다. 
내 몸은 나를 담고 있지 못합니다. 
내 몸이 나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이, 육신이 죽는다 하여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는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몸 안에 있는 나 같지만 실제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내 거처입니다. 
이 하느님을 알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타계한 베네딕도회 고승(高僧)의 다음 편지 대목입니다. 

20세기 수도승 영성을 대표하는 두 분(Jean Leclercq and Thomas Merton)의 편지 중 장 레크레르크의 편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너무 유명한 20세기의 트라피스트 수도회 대 영성가 였고,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세기 수도승 삶의 대 영성가이자 학자인 프랑스 출신의 베네딕도회 장 레크레르크입니다. 

바로 은수생활의 열망을 상의하는 토마스 머튼의 편지에 대한 장 레크레르크의 격려 답신 중 일부입니다.

"지금도 프랑스에는 은수자들(hermits)로서 산속에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여러 수도승들이 있습니다. 
하느님밖에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Nobody knows it except God).“

뒷 영어 구절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은수자가 세상에는 죽고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수도자의 원형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나를 알지 못하고 더구나 남도 나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 만이 나를 알고 이런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나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바로 이를 깨달을 때 '복된 고독'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깨달은 자의 다음 시편 고백입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은수자는 별난 성소가 아니라 
우리 모두 내면 깊이에는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은수자(inner hermit)'가 있고, 
바로 이것이 '참 나'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하느님과의 일치감입니다. 

위령미사 감사송 중 제가 좋아하는, 큰 위로를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구절을 보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이미 이런 새로운 삶을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사는 이들이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래야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거처를 둔 초연한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바로 살아서 이런 경지를 살았던 분이 성인들입니다. 
오늘 1독서 역시 두 예언자의 순교와 부활을 통해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여실히 입증합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 오너라."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영원한 삶'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지상에 살지만 우리의 거처이자 본향은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루카20,38)'.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또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미사 중 영성체 때 주례 사제가 속으로 바치는 다음 기도를 바쳐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지켜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지켜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아멘.




2014.11.22. 토요일(뉴튼수도원 12일째),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260) 기념일 

요한묵11,4-12 루카20,27-40


                                                                                                            


영원한 삶



오늘은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진정 살아있다 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아있다하나 진정 살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 진리를 알 때 진정 살아있는 삶이요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원한 삶의 실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이 경지를 체험하며 사는 이들이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가 이런 영원한 생명의 살아있는 표지입니다. 

아니 수도자뿐 아니라 

세례를 통해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 역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달아 사는 자 얼마나 될까요? 

이 진리를 깨닫고 살아야 죽음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오늘 복음이 고맙습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 몸이 내가 아닙니다. 

내 몸은 나를 담고 있지 못합니다. 

내 몸이 나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이, 육신이 죽는다 하여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는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몸 안에 있는 나 같지만 실제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내 거처입니다. 


이 하느님을 알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타계한 베네딕도회 고승(高僧)의 다음 편지 대목입니다. 

20세기 수도승 영성을 대표하는 두 분(Jean Leclercq and Thomas Merton)의 편지 중 

장 레크레르크의 편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너무 유명한 20세기의 트라피스트 수도회 대 영성가 였고,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세기 수도승 삶의 대 영성가이자 학자인 프랑스 출신의 베네딕도회 장 레크레르크입니다. 


바로 은수생활의 열망을 상의하는 토마스 머튼의 편지에 대한 장 레크레르크의 격려 답신 중 일부입니다.


"지금도 프랑스에는 은수자들(hermits)로서 산속에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여러 수도승들이 있습니다. 

하느님밖에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Nobody knows it except God).“


뒷 영어 구절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은수자가 세상에는 죽고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수도자의 원형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나를 알지 못하고 더구나 남도 나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 만이 나를 알고 이런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나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바로 이를 깨달을 때 '복된 고독'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깨달은 자의 다음 시편 고백입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은수자는 별난 성소가 아니라 

우리 모두 내면 깊이에는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은수자(inner hermit)'가 있고, 

바로 이것이 '참 나'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하느님과의 일치감입니다. 

위령미사 감사송 중 제가 좋아하는, 큰 위로를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구절을 보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이미 이런 새로운 삶을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사는 이들이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래야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거처를 둔 초연한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바로 살아서 이런 경지를 살았던 분이 성인들입니다. 

오늘 1독서 역시 두 예언자의 순교와 부활을 통해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여실히 입증합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 오너라."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영원한 삶'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지상에 살지만 우리의 거처이자 본향은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루카20,38)'.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또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미사 중 영성체 때 주례 사제가 속으로 바치는 다음 기도를 바쳐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지켜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지켜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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