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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관상(觀想;contemplation)의 행복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02 조회수1,350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2.2. 대림 제1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22일째), 
이사11,1-10 루카10,21-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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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觀想;contemplation)의 행복

어제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제대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이 신비롭고 아름다워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촛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 촛불이 없네. 
영롱하게 빛나는 촛불을 목표로 했는 데 빛이 없는 그냥 초뿐이네. 
아, 빛은 찍을 수 없구나. 
하느님도 찍을 수 없겠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하느님께는 어둠이 없습니다. 
빛을 찍을 수 없듯이 하느님도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있어야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빛은 찍을 수 없고, 빛이 있어야 사진을 찍듯이 
빛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빛이 육안으로 보이듯 
하느님의 빛도 관상의 눈에만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6).

주님의 영이 머무를 때 깨끗한 마음이요 하느님을 봅니다. 
관상의 행복입니다.

주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입니다(이사11,2). 

이런 주님의 영에 충만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이사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0,22).

성령에, 주님의 영에 충만할 때 열리는 마음의 눈입니다. 
아버지를 대면하여 대화하는 신비가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신비가로 불림 받았습니다. 

주님의 영이 머무를 때 순수한 마음의 철부지들이요 
이런 이들에게 계시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비전입니다. 

이런 비전이, 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 위에, 이사야 위에 머문 주님의 영이 
우리 위에 머무르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뉴튼수도원 수도형제들과 함께 
성탄츄리 나무들을 팔았습니다. 

"아, 수사님들은 대림시기 내내 주님의 길을 잘 닦는군요. 
이런 솔 향기 은은한 성탄츄리 나무 하나만 집에 놓아도 
부자된 느낌이겠습니다.“

덕담도 나누었습니다. 

흡사 도반(道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흰눈 덮인 순백(純白)의 침묵과 고독의 대지 위에 
깊이 뿌리 내린 '푸른 솔(靑松)' 성탄츄리 나무들입니다. 

대림시기 내내 성탄츄리 나무들을 판매함으로 주님의 길을 닦는 
뉴튼수도원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자는 '실용적 효과' 보다는 '상징적 효과'가 제일인 
푸른 솔 성탄츄리 관상용(觀賞用) 나무를 닮았습니다. 

우리 말은 '관상' 하나이지만, 
한자로 쓰면 관상(觀想)과 관상(觀賞) 둘입니다. 

하느님을 보는 마음이 순수한 관상가(觀想家)에다 
이웃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관상용(觀賞用) 수도자가 되는 것, 

바로 이게 '수도자의 본업'입니다.

모든 것이 실용적 잣대로 판단되는, 
온통 실용적인 것만 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두 관상의 차원을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마태10,23).

관상(觀想;contemplation)의 행복입니다. 
이런 마음 순수한 주님의 영으로 가득한 
관상용 관상가인 믿는 이에게 선사되는 하늘나라의 비전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본보기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보여주는 평화의 비전은 
바로 대림시기의 비전이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함께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11,6).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관상가이자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철부지 같은 마음이 순수한 관상가들 위에 머무르는 주님의 영이요 
이들에게 계시되는 하늘나라 비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마음이 순수한 관상가의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72,7ㄴㄷ참조). 

아멘.




2014.12.2. 대림 제1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22일째), 이사11,1-10 루카10,21-24


                                                                                    

 관상(觀想;contemplation)의 행복



어제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제대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이 신비롭고 아름다워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촛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 촛불이 없네. 

영롱하게 빛나는 촛불을 목표로 했는 데 빛이 없는 그냥 초뿐이네. 

아, 빛은 찍을 수 없구나. 하느님도 찍을 수 없겠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하느님께는 어둠이 없습니다. 


빛을 찍을 수 없듯이 하느님도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있어야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빛은 찍을 수 없고, 빛이 있어야 사진을 찍듯이 빛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빛이 육안으로 보이듯 하느님의 빛도 관상의 눈에만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6).


주님의 영이 머무를 때 깨끗한 마음이요 하느님을 봅니다. 

관상의 행복입니다.


주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입니다(이사11,2). 

이런 주님의 영에 충만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이사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0,22).


성령에, 주님의 영에 충만할 때 열리는 마음의 눈입니다. 

아버지를 대면하여 대화하는 신비가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신비가로 불림 받았습니다. 


주님의 영이 머무를 때 순수한 마음의 철부지들이요 이런 이들에게 계시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비전입니다. 

이런 비전이, 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 위에, 이사야 위에 머문 주님의 영이 우리 위에 머무르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뉴튼수도원 수도형제들과 함께 성탄츄리 나무들을 팔았습니다. 


"아, 수사님들은 대림시기 내내 주님의 길을 잘 닦는군요. 

이런 솔 향기 은은한 성탄츄리 나무 하나만 집에 놓아도 부자된 느낌이겠습니다.“


덕담도 나누었습니다. 

흡사 도반(道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흰눈 덮인 순백(純白)의 침묵과 고독의 대지 위에 깊이 뿌리 내린 '푸른 솔(靑松)' 성탄츄리 나무들입니다. 

대림시기 내내 성탄츄리 나무들을 판매함으로 주님의 길을 닦는 뉴튼수도원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자는 '실용적 효과' 보다는 '상징적 효과'가 제일인 푸른 솔 성탄츄리 관상용(觀賞用) 나무를 닮았습니다. 

우리 말은 '관상' 하나이지만, 한자로 쓰면 관상(觀想)과 관상(觀賞) 둘입니다. 

하느님을 보는 마음이 순수한 관상가(觀想家)에다 이웃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관상용(觀賞用) 수도자가 되는 것, 

바로 이게 '수도자의 본업'입니다.


모든 것이 실용적 잣대로 판단되는, 온통 실용적인 것만 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두 관상의 차원을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마태10,23).


관상(觀想;contemplation)의 행복입니다. 

이런 마음 순수한 주님의 영으로 가득한 관상용 관상가인 믿는 이에게 선사되는 하늘나라의 비전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본보기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보여주는 평화의 비전은 바로 대림시기의 비전이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함께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이사11,6).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관상가이자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철부지 같은 마음이 순수한 관상가들 위에 머무르는 주님의 영이요 이들에게 계시되는 하늘나라 비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마음이 순수한 관상가의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ㄴㄷ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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