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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의초대 2014년 12월 4일[(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04 조회수70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4년 12월 4일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말씀의초대

메시아 시대가 오면 온 유다 백성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베푸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제1독서

<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6,1-6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8(117),1과 8-9.19-21.25-27ㄱㄴ(◎ 26ㄱ 참조)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복음환호송

이사 55,6
◎ 알렐루야.
○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 알렐루야.

 

◎복음

<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묵상

1980년대에 남아메리카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해방 신학’은

당시 교회 안팎에서 큰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해방 신학이 제시하는,

권력자와 특권층의 위치를

 정당화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교회상은,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일부 해방 신학자들이

 사회학적 분석의 방법론으로

사용한 마르크스주의의 오류와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태도 등으로 말미암아

교도권의 우려를 자아냈고,

그들에 대한 제재가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불행한 역사는

남아메리카의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편향되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시각을

바로잡으며 해방 신학 본디의

복음적 열정과 식별을 새로운

 언어로 되살리려는 꾸준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이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해방 신학의

 본디 이상이

 ‘복원’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바람직한 교회상을

 보여 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에서도 그 반향을 듣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 담을 만한,

해방 신학이 제시한 통찰은

 ‘올바른 실천’(정행)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입니다.

 ‘산상 설교’의 마지막

대목이기도 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들었는지가 아니라 올바로

실천하는지의 여부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를

결정한다고 밝히십니다.
독일의 현대 신학자

에버하르트 쇼켄호프 신부는

 최근 저서 『산상 설교』를

 이 구절의 묵상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사랑의 실천’과,

 이 사랑의 실천 없이

 주님의 말씀을 ‘귀’와 ‘입’으로만

아는 데에 머무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단호한 요구는

또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인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길을 걷는 이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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