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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 어디 있느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08 조회수1,028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2.8. 월요일(뉴튼수도원 28일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창세3,9-15.20 에페1,3-6.11-12 루카1,26-38

                                                                                                          
"너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정신 번쩍 나게하는 말마디가 
'너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물음입니다. 

하여 지체없이 강론 제목은 '늘 어디 있느냐?'라고 정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 사람인 우리 모두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이라 하지 않고 
그냥 '사람'이라 쓰는 명칭에 주의를 요합니다. 

바로 우리 보편적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과연 제 자리에서 제 정신으로 제대로 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인지 묻습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거나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밖의 외적 환경에 있는 게 아니라 안의 내적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가난하고 거친 환경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 
하느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에 있다면 천국의 행복이요,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불편한 관계로 자유롭지 못하다면 지옥의 불행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사람'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립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면 이는 유령입니다. 
제대로의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불순종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아내인 여자와의 관계도 무너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먹었습니다.“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인 하느님'과 '여자'에 있다는,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란 말입니다. 
적반하장,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뉘우치는 용기가 전무합니다. 

여자 역시 책임을 지지 않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둘다 변명과 핑계에 급급합니다. 

관계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에 대해 즉시 용서를 청하는 마음입니다. 
관계의 파괴로 마침내 에덴 낙원을 상실한 사람과 여자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사람과 여자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즉각 응답할 수 있겠는지요? 

창세기 사람과 여자에 대척점에 있는 분이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종'의 신원에 충실했던 마리아의 겸손한 응답입니다. 
창세기의 사람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종으로서 제자리에 충실할 때 
성모 마리아처럼 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신뢰와 총애를 받는 삶입니다.

뉴튼수도원에서 은혜로이 실감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육신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제 자리의 공동식사 시간이요,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제 자리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 자리'에서 형제들의 '제 얼굴'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이요 위로입니다. 
우리의 축복 받은 신원을 알 때 저절로 주님의 종으로서 충실한 삶입니다. 

우리의 제 자리는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의 제 자리에 있을 때 죄로 인해 잃었던 품위를 회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복된 제 자리이며 신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유일한 제 자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 할 때 
잃었던 낙원의 회복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세상에 하느님 찬양의 기쁨보다 큰 기쁨도 없고, 
하느님 찬양의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적 일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영원한 제 자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함으로 
우리 모두 온갖 영적 축복을 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찬미 받으소서.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다니3,54). 

아멘.

2014.12.8. 월요일(뉴튼수도원 28일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창세3,9-15.20 에페1,3-6.11-12 루카1,26-38


                                                                                                          

"너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정신 번쩍 나게하는 말마디가 '너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물음입니다. 

하여 지체없이 강론 제목은 '늘 어디 있느냐?'라고 정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 사람인 우리 모두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이라 하지 않고 그냥 '사람'이라 쓰는 명칭에 주의를 요합니다. 


바로 우리 보편적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과연 제 자리에서 제 정신으로 제대로 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인지 묻습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거나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밖의 외적 환경에 있는 게 아니라 안의 내적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가난하고 거친 환경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 하느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에 있다면 천국의 행복이요,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불편한 관계로 자유롭지 못하다면 지옥의 불행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사람'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립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면 이는 유령입니다. 

제대로의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불순종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아내인 여자와의 관계도 무너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먹었습니다.“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인 하느님'과 '여자'에 있다는,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란 말입니다. 

적반하장,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뉘우치는 용기가 전무합니다. 

여자 역시 책임을 지지 않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둘다 변명과 핑계에 급급합니다. 


관계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에 대해 즉시 용서를 청하는 마음입니다. 

관계의 파괴로 마침내 에덴 낙원을 상실한 사람과 여자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사람과 여자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즉각 응답할 수 있겠는지요? 


창세기 사람과 여자에 대척점에 있는 분이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종'의 신원에 충실했던 마리아의 겸손한 응답입니다. 


창세기의 사람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종으로서 제자리에 충실할 때 

성모 마리아처럼 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신뢰와 총애를 받는 삶입니다.


뉴튼수도원에서 은혜로이 실감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육신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제 자리의 공동식사 시간이요,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제 자리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 자리'에서 형제들의 '제 얼굴'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이요 위로입니다. 

우리의 축복 받은 신원을 알 때 저절로 주님의 종으로서 충실한 삶입니다. 


우리의 제 자리는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의 제 자리에 있을 때 죄로 인해 잃었던 품위를 회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복된 제 자리이며 신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유일한 제 자리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 할 때 

잃었던 낙원의 회복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세상에 하느님 찬양의 기쁨보다 큰 기쁨도 없고, 하느님 찬양의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적 일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영원한 제 자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함으로 

우리 모두 온갖 영적 축복을 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찬미 받으소서.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다니3,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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