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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사람 -꿈의 현실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15 조회수1,229 추천수16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2.15. 대림 제3주간 월요일(뉴튼수도원 35일째), 
민수24,2-7.15-17 마태21,23-27

                                                                                                   
성령의 사람
-꿈의 현실화-

'성령의 사람'은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닌 사람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제 수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크리마스 츄리나무를 나르던중 나눈
 평범한 내용의 말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대화는 잠시 잃어버렸다 찾은 장갑에서 시작됐습니다. 
멀쩡한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리니 
남은 한 짝도 아무 쓸모가 없다 생각되어 참 난감했습니다.

"아, 아무리 좋은 새 장갑, 새 양말, 새 신이라도 
한짝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하나와도 같은 
부부중, 친구중 하나가 떠나면 얼마나 힘들까요?“

즉시 수도형제도 공감하여 대답했습니다.

"둘이자 하나인 거지요. 
둘이 함께 있어야 보기도 좋습니다. 
사람도 혼자면 중심과 방향을 잡을 수 없고 
둘이래야 중심도 방향도 잡을 수 있습니다. 
눈도 둘이라야 거리와 방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고, 
귀도 둘이라야 소리의 소재와 크기, 
방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이자 둘의 보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산티야고 순례 중 도반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절감했던 진리입니다. 

하여 사람도 최소한 둘, 눈도 둘, 귀도 둘이어야 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어 산다해도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열린 귀, 열린 눈을 지닌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서두부터 계속되는 다음 대목이 마음에 끌렸습니다.

-그 무렵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로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성령과 나', 둘이자 하나일 때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닌 온전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뒷부분은 이 둘에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란 말마디가 추가됩니다. 

정말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성령과 하나될 때 비로소 발라암처럼, 
'열린 눈을 가진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영안(靈眼)이 활짝 열린 발라암은 
이미 새롭게 회복될 에덴 낙원을,
 새롭게 탄생할 메시아의 날을 내다봅니다. 

마치 성탄을 앞둔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는 말씀 같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나는 한 모습을 본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의 왕홀이 일어난다.“

아, 이런 꿈을, 비전을 잃은 삭막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온통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판 같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이 반쪽이듯이 
꿈과 비전이 없는 현실 역시 반쪽일 뿐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과 귀가 열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지닐 때 
온전한 사람이요 꿈의 현실화입니다. 

하느님을 꿈꾸는 대림시기이고 
하느님의 꿈이 현실화될 성탄입니다. 

'하느님의 꿈의 현실화!'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말마디인지요. 

예수님은 물론 오늘 독서의 발라암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은 모두 
'성령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꿈을 현실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첨예한 대립을 이루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이를 상대하는 예수님입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인 예수님만이 눈과 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반문으로 이들의 예봉을 막아 냅니다. 

이런 천상지혜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이들이 '모르겠소.' 대답하자 예수님도 즉시 대답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우이독경, 모르는 사람은 알려줘도 모릅니다. 
눈과 귀가 열려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총이 아니곤 불가능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마음 활짝 열려있어야 성령의 은총인데 
이들은 완전히 마음이 닫혀있는 
교만의 자폐적(自閉的) 인간들입니다. 

'성령의 사람'에게 '성령과 나', '꿈과 현실'은 둘이자 하나입니다. 
이래야 온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어 
하늘나라의 꿈과 현실이 하나 된 
행복한 대림시기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아멘.

2014.12.15. 대림 제3주간 월요일(뉴튼수도원 35일째), 민수24,2-7.15-17 마태21,23-27


                                                                                                   

성령의 사람

-꿈의 현실화-



'성령의 사람'은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닌 사람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제 수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크리마스 츄리나무를 나르던중 나눈 평범한 내용의 말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대화는 잠시 잃어버렸다 찾은 장갑에서 시작됐습니다. 

멀쩡한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리니 남은 한 짝도 아무 쓸모가 없다 생각되어 참 난감했습니다.


"아, 아무리 좋은 새 장갑, 새 양말, 새 신이라도 한짝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하나와도 같은 부부중, 친구중 하나가 떠나면 얼마나 힘들까요?“


즉시 수도형제도 공감하여 대답했습니다.


"둘이자 하나인 거지요. 

둘이 함께 있어야 보기도 좋습니다. 

사람도 혼자면 중심과 방향을 잡을 수 없고 둘이래야 중심도 방향도 잡을 수 있습니다. 

눈도 둘이라야 거리와 방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고, 

귀도 둘이라야 소리의 소재와 크기, 

방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이자 둘의 보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산티야고 순례 중 도반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절감했던 진리입니다. 


하여 사람도 최소한 둘, 눈도 둘, 귀도 둘이어야 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어 산다해도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열린 귀, 열린 눈을 지닌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서두부터 계속되는 다음 대목이 마음에 끌렸습니다.


-그 무렵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로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성령과 나', 둘이자 하나일 때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닌 온전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뒷부분은 이 둘에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란 말마디가 추가됩니다. 


정말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성령과 하나될 때 비로소 발라암처럼, 

'열린 눈을 가진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영안(靈眼)이 활짝 열린 발라암은 

이미 새롭게 회복될 에덴 낙원을, 새롭게 탄생할 메시아의 날을 내다봅니다. 


마치 성탄을 앞둔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는 말씀 같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나는 한 모습을 본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의 왕홀이 일어난다.“


아, 이런 꿈을, 비전을 잃은 삭막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온통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판 같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이 반쪽이듯이 꿈과 비전이 없는 현실 역시 반쪽일 뿐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과 귀가 열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지닐 때 

온전한 사람이요 꿈의 현실화입니다. 


하느님을 꿈꾸는 대림시기이고 하느님의 꿈이 현실화될 성탄입니다. 


'하느님의 꿈의 현실화!'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말마디인지요. 


예수님은 물론 오늘 독서의 발라암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은 모두 '성령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꿈을 현실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첨예한 대립을 이루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이를 상대하는 예수님입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인 예수님만이 눈과 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반문으로 이들의 예봉을 막아 냅니다. 


이런 천상지혜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이들이 '모르겠소.' 대답하자 예수님도 즉시 대답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우이독경, 모르는 사람은 알려줘도 모릅니다. 

눈과 귀가 열려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총이 아니곤 불가능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마음 활짝 열려있어야 성령의 은총인데 

이들은 완전히 마음이 닫혀있는 교만의 자폐적(自閉的) 인간들입니다. 


'성령의 사람'에게 '성령과 나', '꿈과 현실'은 둘이자 하나입니다. 

이래야 온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어 

하늘나라의 꿈과 현실이 하나 된 행복한 대림시기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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