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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명의 하느님 -생명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17 조회수1,210 추천수15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명준님의 사진.
김명준님의 사진.
김명준님의 사진.


014.12.17. 대림 제3주간 수요일(뉴튼수도원 37일째), 창세49,1-2.8-10 마태1,1-17                                                                                       

생명의 하느님

-생명 예찬-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만든 인조(人造) 성탄츄리가 아닌 

하느님이 땅에다 8-10년 키우신 성탄츄리나무를 사다가 성탄츄리를 만듭니다. 


아주 잘생긴 성탄츄리나무가 버려져 있기에 물었습니다.

"왜 이 나무 베어 놓고 안 가져 갑니까?“

"바로 꼭대기 정상에 별을 달아야 하는데, 꼭대기 머리 부분이 꺾여 나갔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가 말하면서 카톡의 사진을 보여 줬습니다. 

작년 집에 만들었던 성탄츄리 장식인데 

이등변 삼각형의 나무꼴 꼭대기에 큰 별이 환히 방안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 탄생하실 그리스도의 빛이군요!“


탄생하실 '생명의 빛'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무 꼭대기에 별을 달기에 

그 좋은 나무도 꼭대기 머리 부분이 잘려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생명의 빛'의 탄생을 갈망하는 인류의 염원이 녹아 있는 성탄츄리나무입니다. 

성탄츄리나무를 사러오는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가족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젊은 40대 부부의 가족같은데 

한 아기는 어머니 품 안에 있고 

올망졸망 5섯 아이들이 부모 주변을 따르며 나무를 고르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새삼 생명의 풍요로움, 하느님의 축복을 느꼈습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에서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봄 날씨처럼 화창한 파란 하늘의 겨울 날씨였습니다. 


나란히 하늘을 향해 있는 묘비들이 흡사 스물네시간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낮에는 푸른 하늘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밤에는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을 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여기 죽은 수도형제들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삼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음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살아있는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 있는 소중한 생명체들입니다. 

살아있음 자체의 체험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어제 읽은 4세기 경 미사경문에 나오는 한 대목도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We entreat you, make truly alive!"(주님, 당신께 간청하오니, 우리를 '참으로 살아있게' 해주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내면 깊이에는 '참으로 살아있고 싶은(to be truly alive)'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살아있음에 대한 감격을 실감하고 생명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될는지요. 

옛 사막 수도자들도 이 살아있음의 축복을 실감하며 

살기위해 하느님을 찾아 사막에 갔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예수님의 기나긴 족보를 대하면서 생명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대로 '생명의 강'을 연상시키는 족보입니다. 


무려 '낳고' '낳고'로 연속되는 단어를 헤아려 보니 30회 나옵니다. 


'생명의 찬가'처럼 느껴지는 족보입니다. 

그러다 꼭대기의 정상에 찬란하게 빛나는 '생명의 별',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의 족보'는 끝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6).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수고가 대단합니다. 


'낳다'에서 '태어나시다'로 바뀐 말마디의 느낌도 각별합니다. 

하느님의 '생명 사랑'과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감지합니다. 


하느님께도 구원에 이르는 첩경의 길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온갖 부족한 생명들도 쓸모없다 버리지 않고 모두 생명의 족보에, 대열에 합류시킵니다. 


의인들이 족보가, 거룩한 이들의 족보가 아니라 의인들과 죄인들, 경건한 이들과 불경한 이들, 

잘난 이들과 못난 이들 등 모든 생명들을 당신 구원 역사에 합류시키는 하느님이니다.

 

특히 윤리적으로나 출신성분상으로나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네 기구한 여인들-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바세빠-의 등장도 이채롭습니다. 


하느님 생명의 품, 자비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깨닫습니다. 


마지막 절정의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인간적 눈으로 볼 때 마리아 역시 위의 네 여인들처럼 기구하기 짝이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다.“


이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이요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입니다. 


마침내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창세49,10).


옛 번역이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당신 생명의 족보에 편입된 영예로운 신분임을 새롭게 확인시키십니다.


"보라,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들어오리니, 주님의 집은 영광으로 가득 차리라."(하까2,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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