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늘 봐도 보고 싶은 얼굴 - 전환점(turning point)-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0 조회수1,131 추천수1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명준님의 사진.

김명준님의 사진.


2014.12.20. 대림 제3주간 토요일(뉴튼수도원 40일째), 이사7,10-14 루카1,26-38


                                                                                                

늘 봐도 보고 싶은 얼굴

- 전환점(turning point)-


 오늘은 얼굴에 대한 여러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늘 봐도 보고 싶은 얼굴이 있습니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곁에 있어도 늘 보고 싶은 얼굴 말입니다. 


이런 얼굴을 보는 순간이 바로 전환점(turning point)이자 출발점(starting point)이요 

때로는 마침점(ending point)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이 그렇고, 예수님이 얼굴이 그렇고, 

성모님의 얼굴이 그렇고, 성인들의 얼굴이 그렇습니다. 

이런 살아있는 얼굴의 비전을 지닌 자가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시편저자뿐 아니라 실로 모든 성인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을 매해 찾았던 세 제자들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둘은 안토니오 사부를 뵈면 묻고 토론합니다만 

한 제자만은 늘 침묵하기에 마침내 안토니오가 그 사유를 물었습니다.


"It is enough for me to see you, Father(사부님, 당신만을 뵙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잊지 못하는 구절인데 이 일화를 어제 다시 읽었습니다. 


어제 유쾌하게 웃었던 일도 생각납니다. 

긴 말은 통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통하는 여기 성물방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버나딘 수사님입니다. 

일터에 나갈 때 마다 성물방에 들려 덕담을 나누곤 합니다. 


"Do you take a walk(산책 나왔느냐)?“묻기에,

"No, I come to see you, holy monk(아니다. 거룩한 수도승인 네 얼굴을 보고 싶어 나왔다)!“

대답했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3~7%. 나머지는 몸이 말합니다. 

이렇게 주고 받으며 서로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마침 성탄츄리나무 판매하는 수사님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가난한 모습에 언뜻 떠오른 생각입니다.

'아, 현실이, 현찰이 전부는 아니다. 

전부라면 진짜 가난하고 불쌍하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을 때 진정 부요하고 행복하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외적으론 가난했지만 하느님을 소유했기에 내적으로는 실로 부요했고 행복했다.'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자가, 하느님의 비전을 지닌 자가 실로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유명 앵커(손석희)의 유명 배우(한석규)와의 인터뷰중 배우의 말도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배우의 좋은 점을 조금 거창하게 말씀드린다면, 나이 먹는 것을 기다리는 직업이 배우입니다. 

저는 젊었을 땐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근데 나이가 조금씩 조금씩 먹을 때 배우라는 일이 정말 좋구나 하는 그런 점들 중에 하나가 

60이, 70이 돼서 제가 하고 싶은 역, 그리고 그때를 기다리는 즐거움이라 할까요.“


나이 먹는 것을 기다리는 기쁨의 직업이 배우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직업이요 희망이요 고백인지요.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겠구나, 이렇다면 나이들어 가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잊지 못합니다. 


바로 102세 까지 장수를 누렸던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이 그랬습니다. 


며칠 전 뉴욕의 퀸즈 한인 성당의 성모자(聖母子)상 역시 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늘 멀리서만 애모(愛慕)하다 마침내 몸소 찾아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방문하신 것입니다. 

체면상 하느님이 찾아 오셨다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이렇게 예쁘게 살면 

하느님은 때가 되면 당신의 천사를 통해 찾아 오십니다. 


성탄이 임박하니 하느님도 바빠지셨고, 천사의 발걸음도 빨라졌습니다. 


오늘 복음 장면이 숨막히게 역동적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프로포즈, 구애(求愛)입니다. 

하느님의 간원(懇願)이 마리아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에 앞서 모든 우주만물이 조마조마 숨죽였다는 

어디선가 읽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이 생각납니다. 


우주만물뿐 아니라 하느님은 더욱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짝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의 응답에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이 응답이야 말로 온 인류역사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로마에서, 예루살렘에서, 아테네에서, 안렉산드레아에서 

작고 초라한 마을 '나자렛'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고마운 응답으로 마침내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었고 인류의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늘 봐도 보고 싶은 얼굴이 성모 마리아의 얼굴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을, 예수님을 뵙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어제 읽은 감동적인 주석 내용을 소개합니다. 


"마리아는 아직은 '예(Yes)' 가 뜻하는 바를 배워야 했으나 

그 '예(Yes)'는 실로 무조건적이며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십자가 밑에 서 계시면서 공적 죄인으로서 

고뇌와 수치 중에 죽어가는 당신 외아들을 보는 공포스런 순간 등, 

우리가 익히 알 수 있다시피 마리아는 온갖 고난과 시련의 삶 중에도 

결코 '예(Yes)'에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예(Yes)'의 응답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완성됨을 봅니다. 

성모 마리아야 말로 끝까지 '예(Yes)'의 응답에 충실했던 '살아 있는 순교자'의 모범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전환점(turning point)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친히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시고,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항구히 '예(Yes)' 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암울한 국내현실중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성탄에 오실 주님의 도움을 간청하며 

아침 입당시 불렀던(88장) 성가를 기도로 바치며 강론을 마칩니다. 


"임하소서, 구세주여 세상의 어둠 밝히시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이끄소서.

 임하소서, 불의에 찬 이 세상에 

 억눌리어 신음하는 당신 백성 구하소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