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카롤링거왕조 시대의 성당 건축(751-843년) 중세의 건축양식을 둘로 나누면 전반부는 로마네스크(900-1070년)이고 후반부는 고딕(1120-16세기 중반)인데, 로마네스크 시작 이전에 중세 건축의 징후가 나타난 현상들을 모아서 ‘프레로마네스크’(pre-romanesque)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롤링거왕조는 751년부터 프랑크왕국을 통치했다. 843년에 이르러 프랑크왕국은 베르됭조약으로 카롤루스대제의 세 손자에 의해 서프랑크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세 왕국은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토대가 되었다. 건축사에서 프레로마네스크가 중요한 시기는 카롤루스대제가 통치했던 768-814년이다. 고대 로마의 영향에서 시작한 프레로마네스크 건축 카롤루스대제는 아헨의 왕궁과 수도원을 건축의 중심지로 삼았다. 왕궁은 정치, 행정, 제도 등을 담당하는 세속 권력의 중심지, 수도원은 문화, 예술, 학문 등을 담당하는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두 중심이 협력 관계를 통해 중세 문명의 기틀을 닦았다. 카롤루스대제에게 건축 활동 지원은 중요한 항목이었다. 좁은 의미로는 아헨 왕궁 경당을 통해 프레로마네스크 건축을 집대성했으며, 넓은 의미로는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 때 완성된 라틴 크로스(오늘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십자의 아래쪽이 위쪽보다 긴 십자가 - 편집자 주) 유형을 새롭게 확장하여 그리스도교 전례에 맞춰 분화, 확대하는 종합적 발전을 이루었다. 카롤링거왕조의 건축은 공간 구성 측면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과 구별되어 분화하였고 발전을 이루었으나 시공 기술은 로마 건축술을 집대성하여 사용했다. 이는 로마네스크 건축의 기초를 이루며 이어졌다. 이처럼 건축술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로마네스크 양식까지 여전히 로마 건축이 연속되는 측면이 많았다. ‘로마네스크’라는 단어가 ‘로마답다.’를 뜻한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그 뒤에 나타난 고딕양식은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중세만의 독자적 건축술을 이루었다. 아헨 왕궁 경당 카롤링거왕조는 카롤루스가 왕위를 받기 전에 이미 전통 부흥의 일환으로 아헨 왕궁 경당(790-805년 건축)을 계획했다. 카롤루스는 787년 처음으로 방문한 라벤나에서, 기둥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축 자재와 경당 설계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넓은 팔각형의 중앙 공간과 여덟 개의 거대한 문설주가 상단의 둥근 아치를 지탱하며, 기둥으로 나눠진 부수 아치는 ‘산 비탈레 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증가한 수직성과 두꺼워진 벽체, 그리고 모듈(건축을 할 때 기준으로 삼는 치수 - 편집자 주)이 있는 아헨 왕궁 경당을 통해 게르만족의 역동성과 건축적인 발전을 알 수 있다. 중앙 공간의 지름과 높이의 수직 비율이 산 비탈레 성당은 1.78인데 비해 아헨 왕궁 경당은 2.1로 커졌다. 이외에도 석조의 육중함이나 물성 등을 표현하기 위해 로마 조적(돌이나 벽돌 따위를 쌓는 작업 - 편집자 주) 기술을 종합했다. 카롤루스대제는 아헨 왕궁 경당을 지을 때 콜로세움으로 대표되는 로마의 원형극장 조적 기술을 참고했다. 아헨 왕궁 경당의 의미는 산 비탈레 성당의 전례 공간을 콜로세움의 구조와 기술로 축조해서 게르만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로마제국과의 유대를 강조하고 게르만족의 역동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웨스트워크와 이스트엔드로 인한 선형 공간의 확장 중앙 집중형 공간을 갖춘 아헨 왕궁 경당이 프레로마네스크 건축의 문을 열기는 했지만 중세 시대의 교회 양식은 직선의 선형(線形) 공간이 중심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나타났던 라틴 크로스가 정착하면서 복잡하게 분화하고 발전하였다. 고대 로마의 4대 성당 가운데 ‘옛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을 보기로 삼아 서쪽 출입구, 동쪽 성소, 지하 납골당의 세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선형 공간이 확장되었다. 이렇게 해서 커진 서쪽 출입구를 ‘웨스트워크’(westwork), 제대와 주례석 앱스(apse, 후진이라고도 불리며 성당 제대 뒤 반원형 부분을 가리킨다. - 편집자 주)가 있는 동쪽 지성소를 ‘이스트엔드’(eastend)라 불렀다. 지하 납골당에는 고리 모양의 환상형(環狀形) 겹 공간을 만들었다. 카롤링거왕조 때에 그리스도교 전례 정비에 따라 교회의 선형성을 강화하였다. 선형 공간이 강화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금요일에 바친 ‘십자가의 길’을 위한 행렬이었다. 790-799년 건축된 생리키에(당시 지명은 센툴라) 수도원 성당에서는 나날이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때 행렬 예식이 있었는데, 당시 아빠스 알퀴누스(Alcuinus, 730?-804년)가 행렬을 중요하게 여겨 전례에 접목하였다. 성가의 도입도 건축에 중요한 요소였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이끌고자 성가 찬양이 끝난 뒤에도 소리가 오래 남아 울리도록 성당 공간의 수직성과 선형성을 키웠다. 전례 공간의 변화 본디 제대는 대개 이동시킬 수 있는 목재 탁자였고, 일반적으로 성당 중앙에 위치해서 신자들이 제대의 삼면에 모일 수 있었다. 미사 집전자는 제대 어느 쪽이든 동쪽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 부활의 상징이고 햇빛이 많이 내리쬐는 지중해 연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은유였다. 만약 앱스가 동쪽을 향했다면, 집전자는 공동체가 선 제대 쪽에 같이 서서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대는 뒷벽 가까운 곳에 놓이거나 뒷벽에 붙여질 때까지 앱스 쪽으로 더 들어갔고, 제대가 동쪽을 향하든 그러지 않든 집전자와 공동체 모두 제대를 향하게 되었다. 성당 중심부에 있던 제대가 앱스 안쪽으로 옮겨지는 데 기여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베드로 성인 무덤 위의 앱스로 성 베드로 성당의 중앙 제대를 옮긴 일이다. 제대에 사용되는 재료도 목재에서 석조로 바뀌었다. 4세기에 이미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언급한 석조 제대는 6세기에 이르러 일부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769년에 카롤루스대제는 프랑크왕국 안 모든 교회에서 석조 제대만 사용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또한 성인 무덤 위에 제대를 만들던 관습은 제대 자체에 성인의 유해를 매립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6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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