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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4년 12월 28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4 조회수654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41228

루가 2, 22-40,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20세기 현대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가정의 가치가 훼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정은 생명과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는 온상입니다. 생산의 실효성과 생활의 편리함에 시선을 빼앗긴 현대인은 가정의 근본적 의미를 잊어갔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자각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 성가정 축일이 제정되었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그것이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인간다운 생명으로 자라는 곳이 가정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며 배우는 곳도 가정입니다. 오늘의 축일은 가정의 그런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복음은 루가복음서 2장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분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그분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한 부분입니다. 루가복음서 1-2장과 마태오복음서 1-2장은 예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보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역사적 이야기로 만들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산물의 첫 수확과 축산물의 맏배와 자녀들 중 맏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습니다. 성전에 봉헌하였다고 해서 하느님이 가져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에게 필요해서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봉헌물 위에 내려오게 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생산한 것을 우리의 욕심대로 처리하지 않고, 그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고, 하느님의 뜻대로 처리하겠다는 마음다짐과 약속이 담긴 봉헌 의례입니다. 맏물, 맏배, 맏아들을 봉헌하면서 이제부터 생산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고 그분의 뜻대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시메온에게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고’, ‘성령께서 그에게 알려 주셨고’, ‘시메온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모든 중요한 일의 시작에 성령의 일하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1,35), 예수님의 공생활도 성령의 인도로 시작되었습니다(4,14).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것도 성령강림(사도 2,1-4)이 있은 후의 일이었다고 사도행전은 말합니다. 루가복음서의 저자가 사도행전도 집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주신 구원,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구원이라는 사실, 나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에 그리스도 신앙이 있습니다.

 

인간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많은 민속종교들이 그 두려움에 대한 대책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오는 해악(害惡)을 피하고 혜택(惠澤)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산에 가면 산신(山神)이 두려웠고, 바다에 가면 용왕(龍王)이 두려웠으며, 동네에 있는 고목(古木)을 보면 목신(木神)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한 가슴을 안고 신에 대해 생각한 것입니다. 산신, 용왕, 목신, 이런 신들에게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서 재앙을 피하고, 행운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네의 선황당도 그런 행운을 비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강조하며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구원받으라고 말하면, 불안으로 시작된 민속 종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민속 종교 현상은 교회 안에도, 밖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식을 고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식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용서하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은혜롭게 주어진 생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읽어냅니다. 그 은혜로우심에 감동받아 자기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 은혜로우심을 읽어내지 못하여, 이 세상에는 빼앗고, 비방하고, 이기고, 지배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만이 삶의 보람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입니다.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스스로 기고만장 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하느님의 힘을 빌려 좀 더 많이 갖고, 좀 더 강하고, 좀 더 기고만장할 수 있는 길이라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시메온이 예수님 안에 읽어낸 구원,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구원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면서 그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입니다.”(마르 8,34-35). 자기 한 사람 잘 되자고 사는 인생도 아니고, 자기 한 목숨 아껴서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우리는 생명이 은혜롭게 태어나고 삶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시메온이 말한 구원,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십자가가 있어도, 목숨을 잃을 것 같이 숨 막히는 고통의 순간들이 있어도, 우리의 삶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로운 기회입니다. 없어도 되는 나라는 생명이 엄연히 있습니다. 원망과 분노로만 허비하지 말아야 할 생명입니다. 경쟁하고 지배할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생명의 은혜로움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관대하게 또 아름답게 살기 위한 기본조건입니다. 가정은 인생의 은혜로움을 배우고, 실천하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정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살아 있는 가정을 의미합니다. 가족이 서로 돕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가정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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