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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2.25 목/ 말구유의 사랑과 배고픔/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4 조회수973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목 루카 2,1-14(14.12.25)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말구유의 사랑과 배고픔   

 

오늘 하느님께서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그분은 우리처럼 땀 흘려 일하고, 고민하고, 슬퍼하며, 고통을 겪고, 몰이해와 궁핍 중에 사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살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스스로 인간의 살을 취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비천하고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표지이다. 우리네 현실은 더욱 어두워져 가는 것 같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람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고, 사회적 종교적 갈등은 사람들에게 불신과 체념, 절망이라는 그림자를 안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존엄한 인간보다 돈을 더 중요시 하는 자본의 우상화는 심각하다. 연약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들 앞에 그분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기가 죽고 아파하고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당신 친히 ‘연약함의 순종’을 통하여 사랑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육(肉, caro)을 취하신 참으로 거룩하고 엄청난 신비는 그분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223년 그레치오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구유를 만들고 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신비를 온 마음을 다해 회상하고자 했다. 그때는 로마에서 천신만고 끝에 수도규칙을 인준 받은 직후였다. 그는 말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는지를 나의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1첼라노 84) 프란치스코의 원의대로 사람들은 구유를 준비했다. 그는 가난한 임금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이나 베들레헴의 아기라는 말을 할 때에, 그의 혀는 그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 했다.

그레치오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히 밝았다. 비록 고달프고 힘들지만 성탄의 신비가 드러나는 지금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태양,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더욱 밝다. 우리 가슴에 진정한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레치오 구유에서 어떤 사람은 놀라운 한 환시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 없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 그는 자기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예수님께서 깨어나심을 체험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 밤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서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 게으름에 짓눌려 죽어가던 예수님께서 다시 깨어나신 것이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연약함 속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선으로 향하게 하는 거룩함의 힘, 마음의 문과 가슴의 벽을 허무는 사랑의 힘이 바로 오늘 나신 아기 예수님의 선물이다. 말구유에 오신 주먹만 한 분이 우리 편이 되셨다. 시대가 어렵고 사람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적지 않아도 변함없이 기다려주시고 마음을 풀어주실 분이 오셨다. 우리는 우리의 어두움을 비추어 줄 빛을 그리워한다. 우리의 고통을 덜어줄 약을,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슬픔을 위로해 주며 고독한 우리와 함께 할 그 빛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제 내 힘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분과 함께 일어서는 빛으로 힘을 내어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가자.

우리는 내 안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베틀레헴 사람들은 그분께 방한 칸조차 마련해드리지 않았고(루카 2,7), ‘빵집’ 베틀레헴에서 빵 한 조각 드리지 않았다. 주님은 그렇게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성탄의 기쁨은 우리가 밥이 되어 오신 분처럼 다른 이들의 밥이 될 때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도 길거리에서, 어느 시장 모퉁이에서, 싸늘한 지하도에서, 북녘 땅에서 배고픔에 떨고 있다.

우리 앞에는 비어 있는 말 밥통이 놓여 있다. 사랑에 굶주린 이들의 목마름이 배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시련 앞에서의 용기, 미워하고 용서 못하고 지내는 옹졸한 마음 떨어내기, 사회적 약자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루만져드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픔을 겪는 이들과 함께함, 서로에 대한 존중과 격려, 세속적인 것과 적당히 타협하는 어리석은 마음의 청산 등. 이런 것들로 빈 구유를 채우는 것이야말로 성탄의 참 기쁨을 사는 길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갈 때 초라한 말구유가 우리의 마음이 담긴 금빛 성작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나의 가난하고 겸손 마음만이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고, 나의 거룩한 행실만이 예수님을 살릴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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