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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2.26 금/ 영 안에 끝까지 견디는 증거/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5 조회수813 추천수9 반대(0) 신고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금 마태 10,17-22(14.12.2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7,59)


 

St. Stephen the First Martyr
 

 

 영 안에 끝까지 견디는 증거   

 

교회는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 날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억한다. 사도들에 의해 뽑힌 부제였던 성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분배하는 일을 하였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사도 6,8). 그는 과거에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던 최고 회의에서 다시 예수님을 힘차게 증언한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선포하는 이적과 표징들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이나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했을 뿐이었다.

유대인들이 나서서 그와 논쟁을 벌였으나 그의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6,10). 그러자 그들은 화가 치밀어 이를 갈았다(사도 7,54).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보라는 스테파노의 말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아버렸다(사도 7,55-57). 그러자 그들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결국 돌로 쳐 죽였다(사도 7,58). 성경을 일관하는 큰 흐름 가운데 하나는 선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작용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본성, 참 자아로부터 멀어져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움직임이다. 이 둘 사이는 늘 긴장과 대립이 있고, 여기에 구원과 멸망, 영원한 생명과 비참한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 스테파노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면서까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렀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갇혀 자기 유익만을 얻고자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나눔과 공유는 늘 걸림돌이었고 자기 뜻에 어긋나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논쟁을 해보았으나 성령에 충만한 스테파노를 당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크게 분노하여 이를 갈았고 결국 스테파노를 죽여버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스테파노의 죽음을 통하여 결국은 그들 스스로의 어둠과 수치를 폭로한 셈이었다. 스테파노를 죽이려고 그들이 들었던 돌은 자신들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우리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떤 때 왜 화를 내는가? 결국 자기 뜻과의 싸움이요, 자기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소유없이”(sine proprio)의 영성을 망각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이 결핍되어 나에게 관심을 더 가져달라는 표시이며, 하느님 뜻보다는 나의 뜻대로 살고싶은 자기 의지의 표현이다. 애정 결핍의 표지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갈망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반면에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분노라면 하느님의 큰 뜻을 따라 그 안에서, 그 뜻을 위하여 내 뜻을 찾아가도록 질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모든 선, 으뜸 선이시고 자비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이런 거부와 부정, 무질서가 갈등과 혼란, 폭력을 부르고 결국은 죽음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혹시 나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통해 죽음의 상황을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했는가? 그는 어정쩡한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생명과 영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7,59) 하고 기도하였다. 그렇다!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하느님의 방법은 폭력이나 보복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이요 ‘조건 없는 사랑의 수용’이다. 스테파노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하였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을 확고히 믿었기 때문이다.

성탄의 기쁨,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으며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탄생은 스테파노처럼 자신의 영을 주님께 맡겨 드리면서 인내하고 조건 없이 받아들일 때, 영원한 생명, 항구한 기쁨으로 이어져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은 “예수님 때문에”(마태 10,18),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10,22) 끌려가고 미움을 받고 죽음에 처해지기도 한다. 오늘도 인간을 위한 ‘사랑의 죽음’을 각오하고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가장 사람다울 수 있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는”(10,22) 영원한 탄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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