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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교자의 후손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5 조회수1,051 추천수1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독서: 마태오 10,17-22


 


 스테파노의 순교



     < 순교자의 후손들 >

 

기쁜 성탄 보내셨나요? 성탄 다음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이 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순교하시기 위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2011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가톨릭 신문에 실린 현대의 순교 이야기는 바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혹독한 순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700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65%에 해당하는 4550만 명이 20세기에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20세기의 가톨릭 순교자들>의 저자 로버트 로열은 그런 면에서 20세기는 그리스도교 순교 역사 안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고,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안토니오 소치 역시 저서 <새 순교자>를 통해 “20세기는 그리스도교 순교사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 이른바 이 같은 새 순교자들이 대거 나타나게 된 것은 두 차례 걸친 세계대전, 그리고 공산주의, 나치즘, 독재정치, 다양한 배경의 내전 발생 등이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복합적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더욱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 발표된 도움이 필요한 구호이탈리아지부 보고에 따르면 2002년의 경우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1000명 가까운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살해됐다고 합니다. 특히 콜롬비아에서는 2002년 한 해에만 127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였습니다. 특히 중동과 아시아에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가톨릭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살인, 강간, 방화 등의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순교가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성령의 역할이 강력해 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약해졌기 때문일까요? 오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경우를 보면 성령님의 역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사람은 순교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를 잘 읽어보면 스테파노를 순교하게 한 장본인은 스테파노 자신도 아닌, 그에게 돌을 던진 유다인들도 아닌 바로 성령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테파노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주시어 유다인들이 그에게 반박할 수 없도록 하여 화가 나게 만드셨고 또 그들의 분노가 들끓는 가운데 하느님과 아드님의 모습까지 보여주시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의 운명은 다름 아닌 순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셨고 성령님을 받은 사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순교자의 길은 성령님을 받은 모든 이들이 가야하는 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글을 인용하며 순교나 희생이 진리를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기도합니다.

“... 순교자들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불행이었다. 순교는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현혹시켜 왔다. 자기 생명을 진리의 증거로 바쳤다는 그 사실만으로 진리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높였던 사람이 있었던가? 이 오류의 유혹은 그 매력이 매우 강하다.”

[출처: F.니체, <어떻게 살 것인가>, 해누리 p191]

정말 순교는 진리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의미 없는 희생일까요? 순교를 함으로써 그 가해자들의 잘못이 드러나고 반면 순교자가 지닌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벨이 죽음으로써 카인의 잘못이 드러나고 아벨의 제물이 옳았음이 드러나지 않았나요? 사실 진리는 순교 없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그 가치는 참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라틴어의 순교’, 'martyrium'은 희랍어의 증언, 증거란 말의 ‘martyrion’에서 온 것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도 순교만이 증거의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 그것 때문에 이렇게 잡혀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신 분도 성령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6,13). 진정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1요한 5,6). 성령님께서는 우리 목숨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도록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시는 분인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죽음으로, 혹은 순교로 향하지 않는 이는 아직 성령을 통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큰 틀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구하려 하시지만 세상은 그 성령의 힘을 따르는 이를 미워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시려는 마음이 변하지 않듯, 세상도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옛날에 순교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순교자가 나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 더 많은 순교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의 힘도 강력해지고 그 세상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작용도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과 세상과의 싸움이 점점 더 치열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치열한 진리와 거짓, 성령과 세상의 싸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투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졌던 이들도 사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짐으로써 성령의 원수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두드러지게 세상과 맞서 순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 속해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겨야하는 그리스도와 스테파노의 후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토요일은 연수가 있어서 묵상이 없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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