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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영성(true spirituality)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30 조회수1,451 추천수1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2.30. 화요일(뉴튼수도원 50일째), 1요한2,12-17 루카2,36-40


                                                                                              

참 영성(true spirituality)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이렇게 잘 먹어도 되는가?'


자문할 때 마다, 고맙고 송구한 마음에 겸허히 주변을, 세상을 살펴보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예전 수도원 입회 전 교편생활 시절, 봉급날에도 늘 이런 고맙고도 송구한 마음이었습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homesick at home)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요셉수도원에 있을 때나, 안식년을 맞이하여 장충동 수도원에 있을 때나, 

산티아고 순례 때나, 여기 뉴튼수도원에 있을 때나 삶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바로 '무(nothing)의 사막'이 그 본질입니다. 


'무의 사막'은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모두(all)의 낙원'이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말그대로 '무의 사막'으로 남습니다. 

하여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 교부들의 말씀입니다. 


허무(nothing)와 충만(all)의 갈림길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충만이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허무입니다. 

무(無)의 깨달음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여기서 샘솟는 하느님의 마음, 연민(compassion)입니다. 


'사막의 무'를 피하기 위해 온갖 환상이나 우상을 만들어 몰입, 

몰두하여 중독이 되고 간혹 환각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깨고 나면 여전히 상존해 있는 현실이 '사막의 무'입니다. 


오늘 역시 어제의 몇몇 깨달음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성가정 축일인 주일 오전에는 미국 뉴튼수도원에 온 후 

처음 겪는 인터넷 불통으로 마음이 어수선했고 미사때도 다소 어지러웠습니다. 


강론을 홈페이지에 제 때에 올리지 못하니 더욱 안절부절 혼란스러웠습니다. 

순간 '소통은 호흡이자 생명이요 사랑'임을, 

세상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 생명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과의 수평적 소통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수직적 소통이 절대적입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이 둘이 상호관련중에 참된 소통에 참된 영성이요 참 인간의 탄생입니다. 

사람과의 소통만 있고 하느님과의 소통이 없기에 빈약한 영성에 온갖 파생되는 문제들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제 한달 반만에 이발을 했습니다. 

요셉수도원에서 삭발 시작한 후 26년 동안, 이렇게 오랫동안 이발 못했던 적은 처음입니다. 


이발하기 위해 외출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 착한 자매님들의 이발 봉사를 받는 여기 수사님들입니다. 

고아들 같이 꺼벙하던 수사님들이 이발하니 말끔하기가 십년은 젊은 청년들 같았고 얼굴도 더없이 밝아 보였습니다. 


예전 요셉수도원 초창기 때 마르틴 아빠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내가 젊은 수사들만 있으면 남보기에 고아원 같아 연노한 수사님들 두분을 함께 파견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의 수도자들은 그 존재자체가 수도원의 보물이자 산 역사입니다. 

꺼벙해 보이는 젊은 수사님들만 오물조물 모여 있으면 

정말 고아원 같아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수도원은 '고아원'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로, 마리아 성모님을 어머니로, 예수님을 맏형님으로 모신 '성가정'입니다. 


그러니 그냥 고아처럼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부단히 닮아가야 하는 수도자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닮아 가는 것,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모두의 영적 삶의 목표입니다.


어제 잠시 미국 CNN-TV를 본 소감도 나눕니다. 

한국인 3명 등 총 162명을 태우고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출발해 싱가포르로 가던 

에어아시아 QZ8501기가 28일 새벽에 실종된 뉴스가 온종일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계내 일을 국내일처럼 다루고 있었습니다. 

아마 TV를 보는 미국인들의 시야는 세계적일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 동태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우리보다 우리 한국 사정을 잘 알 수 있겠다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긍정적 측면, 

즉 전체를 보되 동시에 부분을,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는 

넓고 깊은 영적시야를 지녀야 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로 개인이든 나라든 생존을 위한 필수 사항입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수도원이든 결코 고립 분리된 섬이 아니라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화장실에서 바르나바 수사와 나눈 덕담도 소개합니다.

"신부님, 여기 미국 뉴튼수도원이 요즘 너무 따뜻해요. 

요즘 한국은 몹시 춥다는데 여기는 한국보다 따뜻한 것 같아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가 뉴튼수도원에 왔기 때문입니다. 저 따라 봄이 함께 왔습니다.“

수사님은 크게 웃음으로 화답했고 저 역시 덕담에 흡족했습니다. 


따뜻한 봄의 마음을 지니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침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종교인들이 만든 잡지명도 생각이 났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따뜻한 연민의 마음이요, 바로 이것이 진정 영성의 표지입니다.


오늘 1독서의 저자인 성 요한 사도와 복음의 주인공인 한나 예언자가 진정 영성가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는 사랑의 사도 요한이 오늘은 세상으로부터의 이탈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2,15)


이 한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무시나 멸시가 아닌 세상에 애착하지 말라는, 거리를 두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래야 진정 세상을 편견 없이 '하느님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초연한 사랑, 순수한 사랑, 연민의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하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한나가 바로 윗 말씀의 살아있는 증거자입니다.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섬겼다니 그 축적된 내공이 짐작이 갑니다. 


이런 끊임없는 '사랑의 수행'을 통한 마음의 순수요, 세상에 살되 세상에 초연한 마음이 됩니다. 


한나의 텅 빈 마음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마침내 '사랑의 눈'이 활짝 열린 한나는 탄생한 구원자 예수 아기를 만났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매일 정성껏 바치는 사랑의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세상에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비워주시고 당신 연민의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오늘의 영성체 후 기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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