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새해 아침 2015년 1월 1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31 조회수790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새해 아침 201511

루가 2, 16-21.

 

새해 2015년의 첫 날입니다. 2015년은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5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하였던 표현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세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14)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는 분이라 우리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시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베풀어진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 행의 세월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