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막의 꽃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02 조회수1,482 추천수1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명준님의 사진.
김명준님의 사진.










2015.1.2. 금요일(뉴튼수도원 53일째), 

성 대 바실리오(330-379)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330-390) 기념일, 

1요한2,22-28 요한1,19-28


                                                                                                        

사막의 꽃


봄이 저 따라 미국 뉴튼수도원에 왔나 봅니다. 

한국은 강추위라는데 여기는 봄처럼 푸근하니 사막 같은 수도원에 훈풍이 감돕니다. 


사막이 상징하는 바 수도원은 물론 세상이요 내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자 나를 만나는 곳이 사막입니다. 


사실 옛 구도자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우기 위해 사막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제 사막을, 광야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내 몸 담고 있는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사막입니다. 


사막에 꽃이 피었습니다. 

사막이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바로 주님 탄생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겨울 한 복판에 봄처럼, '하느님의 시(詩)'처럼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계속되는 성탄축제입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뛰고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려라.


너희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른다.

끝없는 즐거움이 너희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너희와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35,1-10참조).


올 한해, 하루하루가 이런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시대의 아픔과 갈망을 헤아리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최고의 '하느님의 시인'이자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사막의 현실 중에도 이미 패라다이스(paradise)의 낙원을 앞당겨 사는 이사야입니다. 


마침내 주님 성탄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한 이사야의 찬란한 비전입니다. 

이미 이런 파라다이스의 하늘나라 비전을 앞당겨 산 예수님이요 그의 선구자 '광야의 요한'입니다. 

광야의 요한은 사막 수도승의 전형이자 광야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사야의 돌직구가 통쾌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얼마나 당당한지요. 


사막의 수행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 자기를 발견한 요한입니다. 

그대로 광야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신원으로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복음적 삶을 통해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느님이 피어내신 '사막의 꽃'이 바로 요한입니다. 

우리 역시 탄생하신 주님과 함께 사막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어제 2014년 12월 31일 마지막 날은 참 행복했습니다. 

식탁 위의 마티아 수사님 작품인 꽃꽂이가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탄생을 기다리던 대림 촛불 '빛자리'가 주님 탄생을 축하하는 '꽃자리'가 되었습니다.


"아, 저는 매일이 축일입니다.“


옆 형제와 덕담을 나눴습니다. 

마치 꽃꽂이가 제 영명축일을 축하하듯 

성탄시기 내내 제 식탁 앞자리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대로 매일이 축일의 분위기입니다. 


마침 버나딘 수사가 '오늘은 죠엘 아빠스님 생일(birthday)이다.' 하기에 

'Everyday is my birthday(매일이 내 생일이다)'화답하며 크게 웃으니 참 마음 상쾌했습니다.


더불어 영감처럼 떠오른 예수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누더기 옷입니다. 

요즘이야 말끔한 옷들이지만 예전에는 옷도 많이 기워입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수없이 실로 꿰멘 누더기 승복을 입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아, 예수님이 누더기 옷을 입으셨네. 그런데 왜 이리 아름답게 빛나는 옷이지!“


다양한 색깔의 형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상징하는바 바로 '주님의 누더기 옷'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수도공동생활을 하는 우리도 이런 영적 '아름다운 누더기 옷'을 입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진정 '사막의 꽃'으로, 아름다운 '누더기 옷'을 입고 살 때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은 이런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주님 머무르는 삶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정주할 때 

내적사막의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은 서서히 사라지고 안정과 평화의 빛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광야의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주님 안'을 떠나 살기에 그리도 고단하고 아픈 일이 많이 생깁니다. 

궁극적인 위로와 치유도 주님 안에서 만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간곡한 권고가 고맙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이런 확신에 넘치는 희망입니다. 

러니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사막의 꽃'으로 '참 나'를 사는 구원의 길입니다.


둘째, 가난한 삶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적 삶일 때 저절로 따라오는 가난입니다. 

빈궁의 가난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소유한 부유한 가난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요,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산상수훈 첫 말씀에서 인정하셨습니다. 


광야의 요한을 보십시오. 

가난의 절정이지만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당당하고 의연하기로 하면 당대 최고의 부자입니다. 


정치계든 종교계든 

이런 요한 같이 의롭고 용기있고 순수한 야인(野人)인 '들사람'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어제 깨달은 가난이 새롭게 마음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난이구나!“


저녁기도차 성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성당 문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수도형제들, 

또 저녁기도 후 밥을 먹으려 줄줄이 식당을 향해 가는 모습도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가난의 적나라한 장면이었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기도해야 살고', '먹어야 사는' 

우리 모두가 광야의 가난한 수도승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가난의 깨달음이 

하느님께 대한 한없는 신뢰의 사랑, 동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사랑을 지니고, 

지금 여기서 가식이나 거짓이 없는 진실하고 순수한 '참 나'를 살게 합니다.


셋째, 겸손한 삶입니다.


역시 주님 안에 머물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주님은 내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되지만, 

주님을 떠나면 내가 내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되어 겸손은 고스란히 실종되고 교만만 남습니다.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인데 

주님을 떠나서는 나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니 애당초 겸손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 참 사람이요 바로 요한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겸손의 극치입니다. 

등을 굽히는 비굴함이 아닌 무릎을 꿇는 겸손입니다. 


왜관수도원이나 뉴튼수도원의 성전이 좋은 것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받침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진정 겸손의 표지인데 

이것을 잃어버려 가는 것 또한 오늘날 신자들의 큰 영적손실입니다. 


무릎을 꿇어야 신발 끈을 풀 수 있는데 

무릎 꿇을 자격 조차 없는 몸이라 자기를 낮추는 요한의 겸손이 참 아름답습니다. 

내적 아름다움은 겸손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 미사 중 기념하는 '성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처럼, 

또 요한처럼 우리 모두 세상 광야에서 '사막의 꽃'이 되어 '참 나'의 낙원을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98,3ㄷㄹ-4).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