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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03 조회수1,059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1.3. 토요일(뉴튼수도원 54일째) 주님 공현 전 토요일, 
1요한2,29-3,6 요한1,29-3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오늘 1독서 중 다음 말씀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요한3,2ㄱ).

바로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칭호가 참 영예롭습니다. 

이 말마디가 우리 믿는 이들에 대한 정의요, 
존엄한 품위의 신원임을 입증합니다. 

예전 학장님 역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호를 '다운'이라 정했다며 역설한 말씀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에 대비되어 역시 수 십 년전 신학교 시절, 
교수님의 열정적 강의 중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사람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해야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공감했던 말씀이라 강론에도 수차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어제 고위직에 있는 분이 년초를 맞이하여 직원들을 향해 
훈계했다는 기사를 읽는 중, 
몇몇 한자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물론 지도자에 대한 수하 사람들의 자세를 빗댄 용어지만 
우리의 중심에 모신 하느님께 대한 자세와도 그대로 통합니다.

'우리는 여러 불충(不忠)한 일들이 있었다.‘
'이심(異心)을 품어서는 안 된다.‘
'충(忠)이 무엇인가. 한자로 쓰면 중심(中心)"이다. 
우리는 충성(忠誠)해야 한다.‘
'파부침주(破釜沈舟,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히며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왕조시대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용어라 
영 찜찜하지만 이 말씀들을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경우에 
대입하면 그대로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가 충성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이며, 
하느님과 우상을 섬기는 
즉, 두 마음을 품는 불충한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자세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장한 느낌도 들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자세입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말마디들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 카시아노가 강조한 수도생활의 궁극 목표도
 '마음의 순수'였습니다. 
하여 수도자들의 모든 수행도 마음의 순수를 궁극 목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자비와 지혜입니다. 
주님 역시 하느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며 
이심(二心)이 아닌 일심(一心)을 강조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전심전력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아파도 마음만 갈리지 않고 
하느님만 향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갈려 
중심이신 하느님을 잃는 일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 자체가 축복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마음의 순수만은 잃어선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께 희망을 둔 사람들이 지녀야할 자세로 
마음의 순결을 강조합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우리를 순결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밝은 눈'으로 제대로 보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편견없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좋아야 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산상수훈 중 진복팔단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복음의 요한이 좋은 모범입니다. 

광야의 수련을 통해 마음의 순수를 획득한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본 순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환호하는 '순수한 영혼의 사람' 요한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신는 것을 보았다."(요한1,32).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1,34).

오늘 복음에서 유독 많이 나오는 '보았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셋째,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도, 밝은 마음의 눈도 은총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마음의 순결이요 눈도 밝아 집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1요한3,1ㄱ).

요한은 
우리 모두 이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을 강조합니다. 
깨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저절로 위로와 치유입니다. 

계속되는 요한을 통한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입니다."
(1요한3,5-6).

늘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무죄한 삶에 몸과 마음의 일치요, 
또 주님을 뵙고 알 수 있습니다. 

새삼 주님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깨달아 아는 
하느님 현존 체험의 수련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읽은 '관념운동학'을 소개합니다.

-관념운동학은 인체를 인식하고 움직이는데 있어 
심상(Imagery)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심상을 이용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환자들을 도움으로써 
정신적인 이미지(심상)가 실제 신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방식의 핵심개념은 운동은 힘이 아니라 
인식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은 매 순간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충전된다. 
내 몸은 점점 새롭게 되기와 재생의 구현체가 되어간다. 
이 말을 완전히 믿어야 한다. 
우리가 현재 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의 실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사멸하고 탄생하는 세포들이 
만들어낸 한 장의 사진과 같다. 
수 없이 변해왔고 또 변해갈 것이다. 
내가 어떻게 나를 인식하는가는 실질적인 내 몸의 변화를 일으킨다. 
중한 병의 회복뿐만 아니라 좋은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긍정적인 인식의 힘'은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 할 수다.-

마음이 몸을 치유합니다. 
'긍정적 인식의 힘'이 상징하는바 은총입니다. 

깨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일어나는 효과에 대한 
증거로 봐도 무방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주님 현존 체험의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인식하며 수행하는 
성체성사, 성무일도, 성서독서(렉시오 디비나), 성체조배, 
향심기도 및 제반 묵상, 명상기도가 목표하는바도 
이런 집중적 하느님 현존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수련을 전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 '밝은 눈', '주님 안에 머무름'의 수련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안에 머무르는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며 
마음의 순결을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
(요한1,16참조). 

아멘.



2014.1.3. 토요일(뉴튼수도원 54일째) 주님 공현 전 토요일, 1요한2,29-3,6 요한1,29-34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오늘 1독서 중 다음 말씀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3,2ㄱ).


바로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칭호가 참 영예롭습니다. 

이 말마디가 우리 믿는 이들에 대한 정의요, 존엄한 품위의 신원임을 입증합니다. 


예전 학장님 역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호를 '다운'이라 정했다며 역설한 말씀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에 대비되어 역시 수 십 년전 신학교 시절, 교수님의 열정적 강의 중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사람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해야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공감했던 말씀이라 강론에도 수차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어제 고위직에 있는 분이 년초를 맞이하여 직원들을 향해 훈계했다는 기사를 읽는 중, 

몇몇 한자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물론 지도자에 대한 수하 사람들의 자세를 빗댄 용어지만 

우리의 중심에 모신 하느님께 대한 자세와도 그대로 통합니다.


'우리는 여러 불충(不忠)한 일들이 있었다.‘

'이심(異心)을 품어서는 안 된다.‘

'충(忠)이 무엇인가. 한자로 쓰면 중심(中心)"이다. 우리는 충성(忠誠)해야 한다.‘

'파부침주(破釜沈舟,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히며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왕조시대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의 용어라 영 찜찜하지만 

이 말씀들을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경우에 대입하면 그대로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가 충성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이며, 

하느님과 우상을 섬기는 즉, 두 마음을 품는 불충한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자세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장한 느낌도 들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자세입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말마디들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 카시아노가 강조한 수도생활의 궁극 목표도 '마음의 순수'였습니다. 

하여 수도자들의 모든 수행도 마음의 순수를 궁극 목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자비와 지혜입니다. 

주님 역시 하느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며 이심(二心)이 아닌 일심(一心)을 강조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전심전력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아파도 마음만 갈리지 않고 하느님만 향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갈려 중심이신 하느님을 잃는 일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 자체가 축복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마음의 순수만은 잃어선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께 희망을 둔 사람들이 지녀야할 자세로 마음의 순결을 강조합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우리를 순결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밝은 눈'으로 제대로 보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편견없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좋아야 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산상수훈 중 진복팔단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복음의 요한이 좋은 모범입니다. 


광야의 수련을 통해 마음의 순수를 획득한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본 순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환호하는 '순수한 영혼의 사람' 요한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신는 것을 보았다."(요한1,32).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4).


오늘 복음에서 유독 많이 나오는 '보았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셋째,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도, 밝은 마음의 눈도 은총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마음의 순결이요 눈도 밝아 집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3,1ㄱ).


요한은 우리 모두 이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을 강조합니다. 

깨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저절로 위로와 치유입니다. 


계속되는 요한을 통한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입니다."(1요한3,5-6).


늘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무죄한 삶에 몸과 마음의 일치요, 또 주님을 뵙고 알 수 있습니다. 

새삼 주님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깨달아 아는 하느님 현존 체험의 수련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읽은 '관념운동학'을 소개합니다.


-관념운동학은 인체를 인식하고 움직이는데 있어 심상(Imagery)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심상을 이용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환자들을 도움으로써 

정신적인 이미지(심상)가 실제 신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방식의 핵심개념은 운동은 힘이 아니라 인식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은 매 순간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충전된다. 

내 몸은 점점 새롭게 되기와 재생의 구현체가 되어간다. 

이 말을 완전히 믿어야 한다. 

우리가 현재 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의 실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사멸하고 탄생하는 세포들이 만들어낸 한 장의 사진과 같다. 

수 없이 변해왔고 또 변해갈 것이다. 

내가 어떻게 나를 인식하는가는 실질적인 내 몸의 변화를 일으킨다. 

중한 병의 회복뿐만 아니라 좋은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긍정적인 인식의 힘'은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 할 수다.-


마음이 몸을 치유합니다. 

'긍정적 인식의 힘'이 상징하는바 은총입니다. 

깨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일어나는 효과에 대한 증거로 봐도 무방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주님 현존 체험의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인식하며 수행하는 

성체성사, 성무일도, 성서독서(렉시오 디비나), 성체조배, 향심기도 및 

제반 묵상, 명상기도가 목표하는바도 이런 집중적 하느님 현존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수련을 전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 '밝은 눈', '주님 안에 머무름'의 수련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안에 머무르는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며 마음의 순결을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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