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세상 한가운데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시어 ‘우리가 찾기도 전에’, ‘구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다(6,46).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6,47)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저녁' 곧 예수님과 무관하게 욕망과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찬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바로 곁에서 눈여겨 보신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제자들은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6,48)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하느님 밖에서' 자신들의 힘에만 의존하여 풍랑을 헤쳐가려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셨다(6,48).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6,48).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생각할 여백을 주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6,49). 빵의 기적을 보며 늘어난 빵의 양에 놀랐던 그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현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감각이 없는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50) 하고 격려하시고 두려움의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워주신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6,51). 이를 본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여기서 제자들이 넋을 잃은 것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알아뵙는 영적 감수성을 회복함에서 온 '사랑의 경탄'이었으리라.
제자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 까닭은 ‘마음이 무디어서’였다. 포로우(πορ?ω)란 말은 ‘무디어서’라는 뜻 외에도 ‘느낌이 없어서’, ‘이해할 힘을 잃어버려서’란 뜻이 있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영적인 느낌이 없어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힘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도록 파견되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미 그분이 주신 ‘은총의 배’를 타고 있다. 우리네 삶은 세상적인 힘겨루기가 아니며 어떤 일도 결코 나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 손안의 연장’일 뿐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일과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영적 감수성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던 것은 순전히 외적으로 늘리는 빵의 수와 일처리만을 보았지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감수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제자들의 눈을 가려버렸던 것이다. ‘완고함’이란 어떤 일을 통하여 사건과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이해할 능력을 스스로 상실해버린 상태를 말한다. 우리 모두 어떤 처지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를 ‘은총의 배’에 태워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느낌을 회복하도록 하자. 완고함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온유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