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08 조회수1,118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월 8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a year acceptable to the Lord.
(Lk.4,18-19)
 
제1독서 1요한 4,19―5,4
복음 루카 4,14-22ㄱ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 (Edward T. Hall)은 ‘프로세믹스’(Proxemics)라는 근접학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 거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지요. 즉, 45Cm 이내의 친밀한 거리에서의 어투, 말의 내용, 표정, 행동방식 등은 120~360Cm의 사회적 거리에서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권력자 옆에 있는 사람을 들지요. 권력자 옆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실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권력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가장 가깝고 그래서 실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을 떠올려보면 다 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약 낯선 사람이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이 제 곁에 있으면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구십니까? 그 사람이 제일 편한 사람이며,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떠올리다보니, 짧은 이 세상의 삶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누구와 친해져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요?

주님과 45Cm 이내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신 것 같습니까? 가족을 제외한 친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많이 알기 위해 대화를 나눴고 나의 관점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는 어떤가요?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으로 과연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맨 앞자리도 아닌 맨 뒷자리를 선호하고, 미사 시간에 약간 늦게 오고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할 일이 있다며 서둘러 일어나 나가면서 과연 친밀한 관계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장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기쁜 소식을 정말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과 함께 하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무거운 짐처럼 불편하게 생각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부끄러운 행동처럼 여겨서도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우리가 됩시다. 주님께서 가장 신뢰하는 그래서 당신의 옆자리를 내어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쁜 소식이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힘찬 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동 칫솔이 나와도 칫솔은 버려지지 않았다. 티브이가 나와도 라디오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노래가 나와도 옛 노래는 끊임없이 연주된다. 새로운 것은 환영받지만, 익숙한 것은 사랑받는다(김은주).


 

샬롬(자크 필립, ‘평화 안에 머물러라’에서)

우리 죄가 이웃에 대한 자비와 친절의 원천이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토록 쉽게 넘어지는 나인데 어떻게 내 형제를 판단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주님에 내게만 지비로우시고 내 형제에게는 자비롭지 않으시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잘못을 했든 자신 안에 웅크리며 낙담하는 대신 곧바로 하느님께 신뢰하며 돌아서고 하느님이 그 잘못에서 끌어내실 수 있는 선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