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15 조회수1,048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Mk.1,40-42)
 
 
제1독서 히브 3,7-14
복음 마르 1,40-45
 

오늘 새벽 묵상 글은 새벽이 아닌 한낮에 올립니다. 어제 모임 후유증으로 인해서 새벽에 도저히 쓸 수가 없더군요. 이제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아마 이런 일이 다시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면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느 동네에 아주 열심한 교우가 계셨습니다. 성당에서 온갖 봉사 활동을 다 하시며, 더불어 신앙생활도 정말로 열심하신 분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대단한 분이시지요. 그런데 어느 날,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서 고향집에 급하게 갈 일이 생긴 것입니다. 문제는 학교를 다니는 어린 자녀들이었지요. 그래서 성당에 다니는 옆집 가정에 아이들을 부탁하고 고향집을 갔습니다.

이제 저녁이 되었고 옆집 가정은 옆집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너희 집에서 한 데로 하고 밥 먹어.”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멀뚱멀뚱 가만히 있더랍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했나 싶어서 “식사 전 기도 하고 먹으라고.”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더랍니다. 아이들은 식사 전 기도도 할 줄 몰랐던 것이지요. 워낙 부모가 성당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자녀들도 열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당 안에서의 모습과 실제의 삶 안에서의 모습은 달랐나 봅니다.

우리들도 이럴 때가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의 삶과 겉으로 보이는 삶이 일치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가식적인 행동과 나를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위선적인 모습을 간직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지만, 이러한 인간일지라도 여전히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에 큰 힘을 얻게 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실 일이었을까요? 사실은 나병환자가 하고자 했으면 하는 청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나병환자가 바람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나병환자의 청에 그대로 동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치유의 은사를 받은 나병환자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바람을 표시하셨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이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인데 우리는 늘 나만 생각하고 나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보면서 이제는 내 중심이 아닌 우리의 말과 행동이 철저히 주님께 맞추는 주님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주님께서는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혹시 그 문에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걸어 두지는 않았나요?(프란치스코 교황).


 

내가 가진 행복을 세어보세요(인터넷에서 퍼온 글)

공자가 조카 공멸에게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녹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여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공자는 같은 벼슬을 하고 있던 복자천에게도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복자천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는, 예전에 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여 학문이 늘었고, 두 번째는, 녹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지만 틈을 내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같은 벼슬을 하면서도 공멸은 잃은 것이 세 가지가 되고, 복자천은 얻은 것이 세 가지가 됩니다. 잃은 것을 센 공멸은 벼슬하는 것이 고달프고, 얻은 것을 센 복자천은 벼슬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생활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세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셉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비워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셉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이 셀수록 만족감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채워집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