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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18 주일/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소명의 삶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17 조회수819 추천수9 반대(0) 신고

  

연중 2주일 요한 1,35-42(15.1.18)


와서 보아라.”(요한 1,39)

 

  

The First Disciples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소명의 삶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36)라고 말하였다. 그가 예수님을 ‘눈여겨본 것’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뭔가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에 관한 두 가지 전통적 표상이 나온다. 하나는 파스카 때에 잡는 어린양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해방을 상징한다(탈출 12,1-28).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어린양처럼 희생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는 ‘주님의 고난 받는 종’이다(이사 53,1-5). 요한은 이 두 가지 표상을 통해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상기시켜준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과 관계있는 존재가 되도록 이끌고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실 사랑의 주님임을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해주는 도구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요한이 예수님을 거듭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자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다’(1,37). ‘따르다’는 말은 제자직과 관련된 말인데, 스승에게서 배우고 그의 길을 똑같이 걷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1,38).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실은 너희들이 따르려고 하는 내가 누구이며, 따라야 하는 삶이 과연 어떤 삶인지 아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아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요한이 전해준 계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님’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생명의 빵”(요한 6,48)이시고 “세상의 빛”(8,12)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신 예수님이요, 그분의 삶의 자리이다.


자, 예수님을 따라갔던 요한의 두 제자의 태도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자. 우리 각자는 세례를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수많은 영성강의를 듣고 나름대로 선행도 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닮고 똑같이 걸어야 할 그분의 삶이 다른 이들의 죄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 ‘주님의 고난받는 종’의 길임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그분의 정체성에 맞는 삶을 과연 얼마나 철저히 살아내고 있는가? 혹시 내 취향에 맞고 내 뜻대로 길들여진 신자라는 옷을 입고 지탄받지 않을 정도에서 그저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문제는 그저 적당히 따라가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적당주의’나 ‘안일함’이다.


영성생활, 곧 하느님을 따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이제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라는 지점은 없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은 늘 ‘지금보다 더’가 있을 뿐이다. '지금보다 더' 철저히 예수님을 추종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지금보다 더' 열정을 가지고 투신하며, 말씀을 '더' 경청하며, '지금보다 더'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단순한 ‘스승’으로 오해하지 않고 ‘참 메시아’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참 제자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셨다.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지내고 나서야(1,39)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다(1,41). 요한복음에는 성부와 성자, 성자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의 영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메네인’(μενειν)라는 동사가 자주 나온다. 이 동사는 ‘어떤 것 안에 머무르다’라는 뜻과 ‘누구와 함께 친밀하게 일치하다’ 등의 뜻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것은 단지 같은 공간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면서 깊은 친밀감 속에 존재적 일치를 이루었다는 얘기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과 깊은 일치를 이루도록 ‘와서 보아라’ 하고 초대하고 계신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시고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리신다. 곧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신 것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몸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듯 ‘영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 아니라 ‘성령의 궁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자신의 몸과, 그 몸으로 날마다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림으로써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도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말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생각과 고정관념, 선입견, 내 중심적인 사고방식, 가슴보다는 머리에 의존하는 자세, 몸에 익은 습관 등을 버리고, 기도 안에서 영적 감수성을 키워나감으로써 일상의 매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응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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