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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1 주일/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관계의 성사화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1-31 조회수1,080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4주일 마르 1,21ㄴ-28(15.2.1)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The Cure of a Demoniac

 

  

                      

 

 관계의 성사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회당에서 ‘말씀’과 ‘행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해주신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주셨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며 몹시 놀랐다. 어떤 점이 새롭고 권위 있었을까? 당시 율법학자들은 구약성서와 조상의 전통을 근거로 하여 율법의 규범과 조상들의 여러 사화를 가르쳤다. 그들의 가르침은 과거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와 기쁨으로 다가올 희망을 선포하셨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율법의 준수와 전통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소통하시며 하느님 체험으로 가르치셨다. 그 결과 그분의 가르침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 안에 근원적인 변화와 자비를 불러일으켰다(1,23-28).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참된 권위를 살려면 무엇보다도 출발점이 ‘내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이 되어, 말씀대로 행동할 때 권위가 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히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줄 때에 참된 권위가 드러난다. 예수님처럼 온 마음과 정성과 혼을 다해 사랑할 때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와 선이 드러난다. 말씀과 행동이 온전히 일치되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순간이야말로 경이로운 창조의 때가 아닐 수 없다. 말씀을 듣지 않는 권위, 사랑없는 권위,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권위는 참 권위가 아님을 새기자!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함께하는 ‘관계의 권위’이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 하면서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1,24) 하고 외친다. 더러운 영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완강한 항변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다. 더러운 영의 반응은 실은 우리의 죄 곧 하느님과 단절된 모습이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자기 의지를 제멋대로 사용하려는 삶과 태도를 말한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정화해 나가실 온갖 형태의 억압적인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내쫓고 자유와 생명을 선사하러 오신 분이시다(마르 1,25).


오늘날 왜곡된 개인주의가 팽배해가고 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를 하느님과 단절시키고 폐쇄시킴으로써 스스로 더러운 영으로 변신해가는 것이다. 내 돈 쓰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 멋에 살아가는데 왜 간섭하는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것은 바로 나인데 왜 감히 나를 비판하느냐? 너나 잘 하세요! 나의 생각과 성향이 다르면 안 어울리면 되지 등등. 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가? 회당은 하느님과 함께하고, 인간공동체가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느님의 자비를 함께 체험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함께함’, ‘함께 어울림’, ‘함께 아파해주고, 기뻐해주고, 슬퍼해주는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러운 영으로 남게 되리라! 단절은 소외를 부르고 소외는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그분의 말씀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을 드러내고 체험하는 ‘관계의 성사화’가 절실한 때이다.


제1독서는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신명 18,20)고 말하면서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에 있다고 가르친다. 우상숭배는 생명의 하느님을 떠나는 행위로서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죄는 아무 제한도 받지 않으려는 것이며, 한 마디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은 육과 세속의 노예가 되고 만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종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죄악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며, 관계의 성사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불러주셨음을 믿고 먼저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 신자로서 지속되는 삶 가운데에서도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쓰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길임을 가르친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1코린 7,32) 그렇다! 걱정 없는 행복한 삶은 내 안의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품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한 것이리라!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 선과 자유 안에 머무는 행복한 날 되길 바랍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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