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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01 조회수901 추천수14 반대(0) 신고



연중 제4주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j
+ 마르코 1,21ㄴ-28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위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라고 주신 것이지 망가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2코린 10,8).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처주시며 마귀를 몰아내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과 봉사, 희생을 통해서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권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존경에서 따라오는 권위보다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리 누릅니다. 나 누군데... 청와대에 있는데..하면서 권력을 가지고 콧대를 세우려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인 행동’입니다. 마음 안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녀야지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서 권위는 사라지고 권력의 횡포만 살아있어서 걱정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의회의원들이 금배지를 답니다. 왜 금배지를 답니까? 그만큼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 그들을 뽑아놓았더니 자기잇속 챙기는 것에는 발 빠르고 힘든 국민들은 외면하기일쑤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금배지 달 자격이 없습니다. 세금정책이나, 연금개혁등을 하는데 있어서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요? 누가 뽑았습니까?

 

경찰이나 소방대 고위직의 모자를 보면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금테를 두르는 것은 그처럼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수위실의 수위도 금테를 두르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히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금테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금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올바른 권위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희생, 봉사, 말하는 바와 행동의 일치를 통해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는 가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가, 병원에는 의사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대통령은 대통령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하고 성직자는 성직자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인 율법학자들은 배운 것도 많고 권력, 재력을 다 갖췄지만 속은 비어있고 겉모양을 중시하여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3이하).


그런데 왜 더러운 영이 들리게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첫 반응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하며 거부하는 소리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평소에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15,6)는 말씀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생명이 말라 버린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 자기 생활 속에 하느님의 존재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사람,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생활에서는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따로국밥”신앙인입니다. 국 따로, 밥 따로 이듯 ‘신앙 따로, 생활 따로’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두 번째 반응, 증세는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시킨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러운 영을 멸망시키는 것이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파멸시키는 악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할 때 ‘이 말씀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멸망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받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분명 손해를 봐야하고, 바보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기를 좋아하고 나에게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천한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하고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 희생이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말씀을 들었을 때 순명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고 치유해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믿고 순명하게 될 때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고 선언하셨습니다.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권위 있는 말씀을 실행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유광수신부님의 ‘다가오는 예수’를 많이 참조했습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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