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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09 조회수1,029 추천수3 반대(2) 신고


 

 

2015년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동정 기념일 영적독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대화집」에서
(Lib. 2,33: PL 66, 194-196) 
 

그는 더 많이 사랑했기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전능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던 성 베네딕도의 여동생 스콜라스카는 매년 한 번씩 자기 오빠를 방문했다.  서로 만나는 때이면 베네딕도는 그를 만나려고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수도원 소유지로 내려가곤 했다.
 
한번은 매년 해오던 대로 스콜라스티카가 찾아오자 공경하올 오빠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내려가서 여동생을 만났다. 그들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영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온종일을 보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함께 식사를 했다.
 

식탁에서 거룩한 대화를 계속하던 중 밤이 깊어지자 이 경건한 여인은 오빠에게 청했다. "오늘 밤은 제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아침이 될 때까지 천상 기쁨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오빠가 대답했다. "스콜라스티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 내가 수도원을 떠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않니 ?"
 
오빠의 거절을 들었을 때 스콜라스티카는 식탁 위에 자기 손을 모아 그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전능하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윽고 식탁에서 머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번갯불과 우레가 일어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베네딕도와 그의 동료들은 문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베네딕도는 마음이 괴로워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콜라스티카, 하느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시기를, 너는 무슨 일을 했니? "  스콜라스티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뿐이었다. "제가 오빠에게 청했을 때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드니 하느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떠나실 수 있다면 떠나십시오. 여기에 저를 남겨 두시고 수도원으로 돌아가십시오."
 
베네딕도는 자원하여 거기에 머무르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온 밤을 함께 지내면서 영적 생활에 대해 거룩한 대화를 마음껏 나눌 수 있었다.
 
이 여동생이 오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 요한의 말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흘 후 베네딕도가 방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여동생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비둘기의 형상을 지니고 천상 앞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동생의 그렇게도 큰 영광을 바라보고 넘치는 기쁨으로 찬미의 송가를 불러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 드렸다. 그리고 나서 형제 몇 사람을 보내어 여동생의 유해를 수도원으로 모셔 오게 하여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묘지에 안장하였다.

생시에 항상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일치되었던 이들 오누이는 그 육신도 함께 묻히게 되었다.


2015년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제3권 1370-1371)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 9월 3일)

 

부유한 귀족 고르디아누스(Gordianus)의 아들로 태어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또는 그레고리오)는 로마(Roma)에서 교육을 받았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이탈리아 침략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당시에는 로마의 장관이었다.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꿈꾸어 왔기 때문에 그는 574년경에 로마와 시칠리아(Sicilia)에 수도원을 세우고 35세경에 수도자가 되었다. 579년부터 585년까지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활약하다가, 5년 후에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온 뒤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수도자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시켰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593년 그는 랑고바르드족 침략군을 설득하여 로마를 평정시켰으므로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레굴라 파스토랄리스’(Regula Pastoralis, 주교의 직책과 의무), ‘모랄리아’(Moralia, 욥서 주해), ‘대화집’을 비롯하여 800여 통의 서한들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공식 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개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으며,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로마 전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는다.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하에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으로 공경을 받으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서거 즉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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