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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영적독서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11 조회수52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영적독서

 

 

렘브란트의 자화상 ‘돌아온 탕자’

1668~1669년, 캔버스에 유화,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편지에서 
(Ep. 35,4-6.13: PL 16 [ed. 1845] ,1078-1079.1081)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육신의 행위를 죽이는 사람은 살리라." 하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가 살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즉, 종의 영이 아닌 하느님 자녀 됨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줍니다.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한 대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만이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로는 또 우리가 고난을 겪는 데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실상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새사람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마주보게 될 때 우리 안에 나타날 미래의 상급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나타날 영광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로 사도는 계속하여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해방되리라는 희망 속에서 아직 헛됨에 매여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은 자신의 기능에 필요한 은혜를 그리스도에게서 받기를 기대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패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에 참여케 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때 하나의 자유 곧 피조물과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하는 자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의 나타남이 아직 미루어져 있는 상태인 동안 모든 피조물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됨과 우리 구속의 영광을 기다리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구원의 영을 낳는 진통으로 아파하면서 헛됨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을 고대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자명합니다.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우리 자신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선이신 하느님을 마주뵐 때 영육 모두가 구원될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실 때 지금 주님의 교회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뵐 모든 이들이 부패 없이 영광스럽게 또 영예롭게 부활할 때에만 완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 피조물이 완전히 구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랑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는 말씀처럼, 믿음이 우리를 살리듯이 희망도 우리를 살립니다. 
 

2015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P 17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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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축일 12월 7일)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또는 암브로시오)는 갈리아(Gallia)의 지방 장관으로 재직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339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사망 후 로마(Roma)에서 인문 교육을 받아 수사학과 법학 외에 그리스어에도 능통하였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국가 관리의 길을 택해 뛰어난 실력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빨리 출세하였다.

시르미움(Sirmium,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의 지방 법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가 지방 장관 프로부스(Probus)의 고문이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370년에 에밀리아 리구리아(Aemilia-Liguria)의 수도인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가 그 지방을 다스리던 때 밀라노에는 서방 교회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대표자인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주교로 있었다. 아욱센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밀라노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집정관인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질서 회복을 위해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을 중재하면서 암브로시우스는 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과 대화를 통해 화해를 추구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이때 뜻밖에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고 그는 할 수 없이 수락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암브로시우스는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은 뒤, 8일 후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지위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행정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주교 역시 불가피하게 정치에 개입되어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개종자들, 수없이 많은 이교도들 그리고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 등 모든 문제를 새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해결해야만 했다.

주교가 된 후 성 암브로시우스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고,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다. 그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사람은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신부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품을 받은 지 약 1년 만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의 고문관이 된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설득하여 니케아 신앙 고백을 따르도록 하고 서방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 법안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제가 전투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자 암브로시우스는 또 다시 막시무스를 설득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원로원 회의실에 승리의 여신상과 제단을 재건하려는 로마 시 집정관 심마쿠스(Symmachus) 일파의 시도를 분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85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로 아리우스주의 추종자인 황후 유스티나에 의해 일단의 무리들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내주라고 명한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390년 테살로니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군인들에게 진압을 명령했을 때, 군인들의 무차별 진압으로 7,000명이 살해당하였다. 이에 성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에게 범죄의 중대함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참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공식 참회 행위로 보속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해 성탄 때 제복을 벗고 참회복으로 갈아입고 통회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황제는 교회 안에 있다. 그는 교회 위에 있을 수 없다.”

393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갈리아에서 아르보가스투스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대표자 에우게니우스는 우상 숭배를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그들의 살인과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 내에서 우상 숭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개월 후에 죽게 되자, 성 암브로시우스가 그의 장례 때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도 그 후 2년 뒤에 밀라노에서 운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행정가이면서도 성서, 신학, 신비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만하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이단에 빠져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를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했으며, 387년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성 암브로시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또한 그의 저서 중에 “신비에 대해서”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의 기도로 활용하도록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 “동정녀”(De Virginibus), “신앙론”(De Fide) 등이 있다.<마라아 사랑넷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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