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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영적독서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16 조회수81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영적독서

 

<하느님의 눈 아래와 손 위에 올려진 우주>, 1510-1515년경, 얀 프로보스트
(Jan Provost 1465-1529), 목판에 유채, 50 x 4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아리우스 이단을 반대하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io 2,78.81-82: PG 26,311.319)


창조주이시고 사람이 되신
지혜를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외아드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조성자이십니다. 성서는 "주님이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그 모두를 지혜로써 이룩하셨으니, 온 땅에 당신 조물 가득차 있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성된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훌륭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께서 피조물의 위치에 내려오시어 만물과 각 피조물에게 당신의 인호와 당신 모상의 유사성을 박아 주시어 조성된 것이 지혜로 장식되고 하느님다운 업적으로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의 상징인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 역시 지혜 자체이신 말씀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담겨 있는 이 지혜를 통하여 생각하고 이해할 힘을 갖게 됨으로써 창조자이신 지혜를 맞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또 그를 통하여 영원한 지혜의 아버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서는 말해줍니다."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모시고 있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안에 영원한 지혜의 창조된 한 몫이 박혀져 있기 때 문에 창조자이신 지혜 자체께서는 피조물 안에 있는 그 몫을 당신 것으로 여기시면서 "주께서는 나를 당신 업적 안에서 창조하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먼저 설명한 바와 같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지 못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우리가 전하 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 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옛날처럼 피조물 안에 존재하는 지혜의 상징과 그림자를 통하여 당신을 알게 되는 것을 더 원치 않으시고 참된 지혜 자체께서 육신을 취하여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믿는 사람이 모두 그분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지혜는 과거에 피조물에 박혀져 있는 자신의 상징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래서 성서는 그분이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 당신 자신을 통하여 성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말씀이신 지혜께서는 요한이 말하는 대로 사람이 되시고 죽음을 멸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심으로써 한층 더 분명히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을 통하여 성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소서."

온 땅은 이 지혜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지니고 계신 지식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아드님이 지니고 계신 지식은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누리시는 기쁨을 아드님도 아버지 안에서 누리십니다. 지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두고 즐거워 하셨고 나는 매일 그분의 현존 앞에서 즐거워 했도다."


2015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제3권 P 204-206)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축일 5월 2일)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으로 여겨지는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경과 신학이 뛰어났다. 318년 부제로 서품된 후 자기 고향의 알렉산데르(Alexander)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3년 뒤인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그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반기는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시켰다. 그러나 성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에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사막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존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시편 주해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와 함께 그리스의 교회학자이자,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등이 있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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