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17 조회수1,278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Watch out,
guard against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the leaven of Herod.
(Mk.8,15)
 
 
제1독서 창세 6,5-8; 7,1-5.10
복음 마르 8,14-21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엘런 랭어(Ellen Langer) 교수의 실험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도록 어떤 사건을 몰래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절반의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실수를 그림 속에 담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반영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스케치가 이런 지시를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창의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예를 들어, 토끼를 그리려다가 귀를 잘못 그리게 되어서 대신 여우로 바꿔 그리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여우 그림이 처음에 그리고자 한 토끼 그림보다 더 멋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실수 때문에 낙담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수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나쁜 것이 아님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실수를 통해 죄로 기울어지는 경우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 실수했어!”라면서 벌을 내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경우 침묵 속에서 우리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다시 당신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안일한 태도입니다. 죄로 기울이지는 실수들을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간과하는 태도는 주님과의 일치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을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커다란 실수라도 다 용서해주셨고,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당신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여주어도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빵이 없음을 두고 걱정하여 말하지요. 이미 빵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고, 지금 현재에 일에 집착하는 실수를 또 다시 범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사랑에 의지하면서 이제는 우리의 실수를 하나둘씩 줄여 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과거 제자들이 받았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형편없는 결정을 할 때마다 뛰쳐나가 또 다른 결정을 한다(해리 트루먼).


토끼를 그리려던 실수해서 그린 여우 그림이 더 멋있을 수도 있습니다.

 

동그라미를 그려 보면(‘좋은 생각’ 중에서)

가수 김창완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한 청취자가 사연을 보내왔다. 그는 직장 스트레스로 살이 빠져 갈비뼈가 보일 정도라고 했다. 이에 김창완은 직접 손 편지를 남겼다.

“뼈가 드러나게 살이 빠지셨다니 제가 다 안쓰러운 기분이 듭니다. 근데 너무 예민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완벽주의거나,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 잰 듯 떨어지지 않습니다. 좀 여유롭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부터 여백이 되는 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겠습니다.”

그는 편지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말을 이었다.

“마흔 일곱 개를 그렸군요. 이 가운데 두 개의 동그라미만 그럴 듯합니다. 회사 생활이란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 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퍼스 등의 도구가 아닌 손으로 직접 그리는 동그라미. 누가 완벽하게 그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삐뚤삐뚤하고 찌그러졌어도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님을 기억하면서, 어떤 모양이든 동그라미를 그렸음에 만족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