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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21 조회수1,120 추천수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2월 21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to repentance but sinners .
(Lk.5,32)
 
 
 
제1독서 이사 58,9ㄷ-14
복음 루카 5,27-32
 

음악에서 있어서 청음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즉, 리듬이나 멜로디, 하모니 등을 듣고 그것을 악보에 받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지요? 전혀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음악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음악을 하겠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음악을 그만두라고 말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남이 들을 수 있는 곡을 쓰겠다고 한다면 대부분이 콧방귀를 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뒤로 한 채 역사에 길이 남을 곡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입니다. 그는 스물다섯부터 귀가 멀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머거리가 음악을 한다는 것,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지요. 그러나 그는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음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은 이것이었습니다.

“운명이여 박수를 쳐라. 희극은 끝났다.”

말도 안 되는 일, 그래서 스스로의 삶을 희극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른 이들에 대한 어떤 섣부른 판단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 많은 이들을 판단하고 때로는 단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요. 당시 세리는 이렇게 평가되었습니다. ‘돈 욕심이 많고,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으로 가득 차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죄에 항상 얽매어서 구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이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비난합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한데 두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극히 세속적인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주님 일행이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을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이런 억지 마음에 대해 당신은 재판관이 아니라 의사로서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은 단순히 세리라는 죄인을 구하시겠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우리 모두를 향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가 아닌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이런 모습이 나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교만한 생각을 갖게 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외면하게 됩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따른다면 자신은 빠지겠다는 교만이 묻어 있습니다. 과연 이런 마음을 통해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교만보다 겸손한 마음, 주님께서 이 땅에서 직접 보여주셨던 가장 겸손한 모습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으니까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용감하게 맞서라(유대인 격언).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소통이 안 되는 세 가지 문제(박웅현, ‘여덟 단어’ 중에서)

첫 번째,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남과 여의 차이도 엄청나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과연 소통이 되겠는가?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혼낸다. 그러나 내 자신이 아이였을 때는 어떻게 했는가? 아이 시대와 부모 시대가 똑같을까? 그렇지 않다. 그 다름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영어를 섞어 말한다면?

세 번째,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남들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전혀 설명 없이 하고 싶은 말만 해댄다. 소통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대화 할 때, 내 머릿속에 있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걸 끌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큰 공감을 갖게 됩니다. 항상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기 때문에, 남을 단죄하는 행동까지 하는 것이 되겠지요. 내 머릿속이 아닌,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서로 소통 중인 성모님과 엘리사벳, 그리고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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