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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먼저 싸워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28 조회수958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사순 제2주일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


복음: 마르코 9,2-10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부활? 먼저 싸워야! >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시대의 한 남자의 복수극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180년경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2년에 걸쳐 게르마니아 정벌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벌대의 대장이 바로 막시무스입니다. 왕은 로마에서 편히 먹고 지내는 자신의 아들 코모두스가 아닌 막시무스에게 로마 왕권을 물려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코모두스는 자신의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고 막시무스와 그 가족까지 모두 죽이라고 분부를 내립니다. 막시무스는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아내와 아들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노예로 전락하여 경기장에서 로마 병사와 싸우다 죽어야하는 검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술과 전투능력이 매우 뛰어났기에 나중에는 콜로세움에서 황제가 보는 가운데 로마 군인들과 전투를 벌입니다. 황제는 그가 막시무스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에 군중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결국 머리를 쓴 것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결투를 하여 로마인들로부터 자신의 왕권을 인정받겠다는 것입니다. 미리 막시무스의 옆구리를 칼로 찔러 서서히 죽게 만들어놓고 사람들 앞에서 결투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막시무스가 승리하고 황제를 죽이고 자신과 같은 노예들을 다 놓아주게 만들어놓고 자신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만나는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로마 황제를 위해 싸웠지만 결국 한 명의 노예로 전락하였고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로마 황제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인물들이었을까요? 바로 글래디에이터처럼 왕들과 겨룬 인물들입니다. 왕을 섬기며 편하게 살면 좋았을 것을 굳이 고생하며 목숨을 바쳐 왕들과 대결했던 복수의 화신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키워준 이집트 왕실에 반기를 듭니다. 수많은 재해를 가져오고 이집트 모든 집안의 맏이를 죽이는 불행까지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를 바다 속에 수장시켜버립니다. 이것만이 그들 세력의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로 이끌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 묻힙니다.

그런데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성경엔 분명히 땅에 묻혔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생명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라자로도 부활했지만 그는 다시 죽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냥 부활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제자들도 사실은 그 뜻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그 차이는 아주 단순합니다. 부활은 그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뜻은 성령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다시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면 다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인 성령으로 부활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

그렇다면 모세는 육체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과 싸우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온 세상과 싸우고 계심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당신과 같은 처지에 처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시며 세상과의 싸움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됨을 되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33)

지금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결전을 하시기 위해 타볼산에서 내려오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영광만을 바라며 그 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승리의 영광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셔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탄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세상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데 가끔은 이 원수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돈과 명예와 성공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원수를 섬기면서도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부활은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고 그 싸움의 대상은 바로 마귀와 육신과 세상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또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바로 바알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과 혼자서 대결한 인물입니다. 그들 뒤에는 아합왕과 이제벨 여왕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항상 왕은 나를 두렵게 하는 대상입니다. 사실 파라오 왕이나 아합, 이제벨 등은 모두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두렵게 해서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나의 왕이 내 안에 있는 자아인 것입니다. 겁이 나게 만들어서 십일조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재물에 무릎 꿇게 만드는 왕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왕과 싸워 승리해야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무엇이 내려오는 시합을 했습니까? 바로 불입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불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만이 영원한 생명이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힘도 성령님이십니다.(로마 1,4 참조) 바알 예언자들이 자기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까지 성령의 불을 청했지만 성령은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 세상을 섬기면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 혼자서 왕과 왕비와 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정면대결을 펼쳤던 엘리야에게는 성령께서 내리셔서 제물을 다 태우고 뿌려놓은 물까지 다 말려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성령으로 상징되는 불 마차에 들어올려졌습니다. 이것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입니다. 홀로 싸우려고 했기 때문에 홀로 승리를 거두었고 홀로 성령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으로 부활하지 못한 이들은 모두 죽은 이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세상과 싸우기보다는 세상과 타협하여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우상숭배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금송아지는 우리를 성령으로 부활시킬 수가 없습니다. 편안하게 천막을 지어놓고 머물려는 마음을 버립시다. 우리 또한 분노에 찬 모습으로 성령의 칼을 들고 온 세상과 싸우러 나가야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전까지 지금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신의 부활 이후에야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광이 아니라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우다 죽어야만 한다는 소명을 되새겨주는 결전을 위한 결심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매 기도할 때마다 이런 결심이 새로 서야합니다. 우리 또한 세상과의 싸움을 하기 위해 타볼산을 내려오시는 그리스도의 그 비장한 눈빛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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