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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1 주일/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역설과 부조리 속에 찾아가는 신앙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2-28 조회수936 추천수5 반대(0) 신고
    
사순 2주일 마르 9,2-10(15.3.1)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역설과 부조리 속에 찾아가는 신앙  

 

살다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실 인간 존재 자체가 모순이요 역설이며, ‘문제’요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의 연속’이니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내고 따지며 이성적 잣대로 남을 판단하기도 하여 상대를 증오하는 일도 생긴다. 나아가 성경 말씀, 교회의 가르침,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이성의 끈을 붙들고 이성에 비추어 바라볼 때에 거부감, 혼돈, 갈등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신앙생활에 무관심해지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도 발생한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이런 실존적, 영성적 실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준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준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고 요구하신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요구이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 더구나 살던 곳을 떠나 생명을 이어갈 외아들을 죽여 번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는 ‘잔인한 살인 요구’가 아닌가? 이 감당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요구에 따라 외아들에게 번제에 쓰일 장작을 짐 지우고 모리야 땅으로 외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랐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 아브라함이 모순과 역설 앞에서 겪는 당혹스러움과 어두움은 바로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 여정이다. 신앙은 이성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역설의 연속이요, 인간의 눈에 모순으로 보이는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도전’이다. 이성의 잣대를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 이 역설과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요구하신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분명 ‘잔인한 살인 요구’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철저한 믿음의 봉헌’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야로 걸어가는 절대 침묵 속에서 ‘이성의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엄청난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였다.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모리야 땅까지의 침묵속의 여정은 고통과 불안의 시간이요, 바로 역설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회문제와 불의 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하고 갈등하는 우리 자신의 여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작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현실, 부조리를 접할 때는 이성의 끈을 놓지 못한다. 역설과 모순의 삶 자체를 신앙으로 눈으로 바라보거나, 성경말씀을 통해 재해석하거나, 또는 기도 안으로 그것을 끌어들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고 그에 따라 투신하는 것이 바로 영성생활이요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이런 현실을 접하면서 감성적으로 반응하거나 이성으로 판단하는데 그치고, 때로는 체념하고 절망하며 피상적인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아닌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던 제자들은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라고 말한다. 베드로 사도가 엿새 전에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였다고는 하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그 영광 안에 그저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고통 받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지 못한 채 안주하는 듯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삶의 역설과 모순이 가져다주는 당혹스러움과 혼란, 분노, 부조리를 신앙의 눈으로 읽어내는 십자가의 길보다는 당장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더불어 고난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맛들이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희생과 투신, 포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태도가 나에게 있는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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