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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영적독서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01 조회수524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영적독서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
 
(Cat 3,24-27: SCh 50,165-167) 
 

모세와  그리스도
 

유다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유다인들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 보았던 기적들보다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파라오와 그의 군대들이 익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악마와 그 군대들이 물에 삼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다를 통과했고 여러분은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에집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여러분은 악마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멍에를 벗어 던졌고 여러분은 훨씬 더 비참한 죄악의 노예 상태를 벗어 던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영광스럽게도 그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유다인들은 동료 노예였고 한 민족이었던 모세의 변모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없었지만, 여러분은 영광에 싸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울로는 "우리가 주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모세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걸었지만 이제 여러분은 모세의 은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걷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에집트 다음에 사막이 있었지만 여러분에게는 여정이 끝나면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의 안내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모세였고 이제 우리의 안내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다른 모세 곧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옛적의 모세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서가 말하는 것과 같이 "모세는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특징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분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감미로운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때 모세는 하늘로 향해 손을 쳐들어 천사들의 빵인 만나를 내리게 했습니다. 우리의 모세께서는 당신 손을 하늘로 쳐드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가져다 주십니다. 옛 모세는 바위를 쳐서 물을 흐르게 하였고 이분은 영적인 식탁을 쳐서 성령의 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식탁은 한가운데 있는 어떤 샘과 같습니다 흩어져 있는 양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 샘에서 구원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은총으로 넘쳐흐르는 이와 같은 풍성한 생명의 샘을 가지고 있으며 또 갖가지 은총으로 넘치는 식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알맞은 때에 우리를 도와줄 은총과 자비를 받기 위해 진실한 마음과 순수한 양심을 가지고 그리로 나아갑시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성부께 영광과 영예와 권세가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2015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제2권 P 146-14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축일 9월 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 사이에 태어났는데,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44-354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으나,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친구로 후에 타르수스(Tarsus)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Diodurus)와 함께 성서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리티우스(Melitius)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에 가서 노(老)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간 고행과 성서 독서의 생활을 하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자,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어린 간청 때문에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는 381년 멜리티우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플라비아누스(Flavia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다. 그의 강론이 너무 유명해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즉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90년부터는 신약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황제는 성 요한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이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수스(Ephesus)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요한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한편 처음에는 황실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비난하여 악화되었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성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환하였다. 그 후 404년에 황제는 그를 다시 쿠쿠수스(Cucusus, 지금의 알바니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되자 황제는 다시 흑해 동편의 피티우스(Pityus)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요한은 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명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Roma)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Pius V)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굿뉴스 오늘의 성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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