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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3월 3일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영적독서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03 조회수496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년 3월 3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영적독서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140,4-6: CCL 40,2028-2029)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겪는 수난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소서." 이와 같은 말은 우리 모두가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나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전체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가지고 계실 때 드리셨습니다. 그분은 이승에 계실 때 당신의 육신적인 몸으로 성부께 기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는 동안 핏방울이 그분의 온 몸에서 흘러내렸습니다. 복음서에 "예수께서는 열렬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는 동안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이 피는 온 교회의 순교자들이 겪는 수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소서. 내 항상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목소리 귀여겨 들어주소서." 그런데 여러분은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라고 외침으로 기도하는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부르짖은 후에 이것으로 마음이 흡족함을 느끼면 안되겠습니다. 환난이 끝나면 부르짖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환난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다면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소서."라고만 기도해서는 안되고 "내 항상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목소리 귀여겨 들어주소서."라는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 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 제사 같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기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분이 바치시는 기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상 주님은 저녁이 다가오고 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다시 얻으실 당신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우리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아니었습니까? 성부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이시고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신 그분을 언젠가 한번 멀리하고 버리셨는데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 혔다." 고 한 사도의 말대로 우리의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의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이 바로 저녁 제사요 주님의 수난이고 주님의 십자가이며 구원의 희생 제물의 봉헌이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번제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 저녁 제사는 아침 제사가 되었습니다. 믿는 이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기도는 거룩한 제단에서 향이 피어 오르듯 순수하고 바르게 올라갑니다. 주님의 향기보다 더 향긋한 것이 없습니다. 믿는 이는 모두 이 향기를 지녀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2015년 3월 3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데성무일도 제2권 P 154-156)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 0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이교도인 로마 관리인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모친 성녀 모니카(Monica, 8월 27일)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Carthago)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적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Roma)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Milano)의 수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통해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보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서를 들어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바오로(Paulus)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Alypius,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387년 4월 13일 부활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로 서품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 아프리카의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봉사하였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범사를 행했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꼭 강론을 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였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정의를 위하여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Donatism)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Manichaeism)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청중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해서도 책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전해오는 저작으로는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는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적적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es)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De ciavitate Dei)이 있다. 그는 흔히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린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학자이며 영성가였다. 그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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