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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진우 신부님 매일 묵상 글-『무겁고 힘겨운 짐外 2편』
작성자김동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03 조회수957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무겁고 힘겨운 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동기만 올바로 부여된다면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힘겨운 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부담이 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것이 ‘레저’라는 이름을 달고 휴식의 일환으로 제시되면 몸에 알이 배이더라도 그 일을 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편하고 좋은 것이라도 내가 원치 않으면 그것은 무겁고 힘겨운 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앙생활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자신은 부담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으려 하면서 타인에게는 부담을 지우는 이들, 그들이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율법의 열쇠를 쥐고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않으면서 오직 ‘계명과 의무’만을 전한 셈이었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계명과 의무의 무게에 허덕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 무게를 교묘하게 피하고 다녔지요.

예를 들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십일조라는 규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십일조의 근본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낸다는 퍼센테이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의 근본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히 인정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의 일부를 다시 내어놓아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헌데 이 규정에서 오로지 말 그대로의 십일조만을 강조하고, 그것을 완성하게끔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서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정작 자신들은 그 ‘십일조’의 규정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근거를 애써 찾아내어 하느님에게 아무것도 돌려 드리지 않으려고 하지요.

하느님에게 감사드리는 일,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은 모두가 이루어야 하는 과업입니다. 거기에는 사제고 수도자고 평신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도 하느님께 받은 것을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의 십일조는 하느님을 향한 더 열정적인 봉사가 될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 역시도 자신의 봉헌생활을 기쁘게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 결실로 받은 재물을 봉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서 오로지 ‘돈’과 그 ‘양’만을 생각하는 이들은 ‘십일조’의 규정을 강조해서 강요하다시피하고 자신은 그 규정에서 교묘하게 빠져나와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본질을 깨달아 모두가 기쁘게 하느님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나 그런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그런 사실을 주지해서 사람들이 올바로 깨닫고 기쁨 중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 선행의 본질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6-17)

성경은 ‘선행’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잘 언급해 줍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과연 선행인지를 잘 알려주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선행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상’을 제멋대로 정해두고 그 하느님 상에 맞추어 선행을 해석하지요. 하느님의 상은 사람별로 제각각이고 적지 않은 경우에 자신이 오래 몸담아온 생활 습관과 굉장히 연계되어 있으며 부모님의 모습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맞추는 삶’을 살려는 것이 우리의 흔한 모습이지요. 그리고 그 기대라는 것을 지극히 ‘율법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착각을 하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일을 원하는데 말이지요.

금육을 지키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까요? 그건 금육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금육 그 자체보다는 금육을 지키는 그 정신을 중요시하는 분이 하느님이시지요. 만일 금육을 지켜서 ‘의무’를 다해서 양심의 불을 잠재우려는 수준이면 그런 금육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금육만을 지키고 나머지를 다 허용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본체만체 하면서 금요일에 고기가 조금 든 국물은 먹지 않겠다고 나서는 지독히 율법주의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위의 성경구절과 같은 것들입니다. 공정을 추구하는 것,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는 것,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물론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박해에 시달린다고 억압받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물질문명’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학교에 다니는 엄마들은 ‘교육열’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직장인은 ‘승진’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고, 젊은이들은 ‘취업’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한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모조리 이루어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게 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본질을 추구하게 도와주는 것이 그들을 억압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고아들은 부모를 상실한 이들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고아들도 돌보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고아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이들이지요. 그들의 권리를 찾아준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을 다시 아버지로 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고아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과부는 남편을 잃어버린 이들입니다. 남편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중심이 되는 결정을 하고 가족을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든든한 존재를 상실해서 막막한 생의 현장에 내던져진 이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되찾아주는 작업,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발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해방을 선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 23,8)

혹자는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가톨릭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즉,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라는 구절이 엄연히 있는데 우리는 신부를 ‘아버지(father)’로 부른다는 것이 그들의 비난사항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의 아버지조차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스승이든 선생이든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단순무식한 논리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그런 식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피를 먹지 말라면 피를 안먹고, 토요일날 쉬라면 토요일날 쉬는 식이지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상을 본뜬 모든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해서 가톨릭의 모든 성인상을 비난하기도 하지요.

이 성경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참된 아버지의 위치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땅히 존경심을 가져야 하고 섬겨야 합니다. 십계명에도 분명히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잘 적혀 있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것은 홍길동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버지로 오직 하느님을 마음 속에 간직하라는 의미이지요. 하느님이 우리 입에서 나오는 호칭을 늘 유념하고 있다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장부에 적어놓고 나중에 꾸중할 각오를 다지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라 불러도 됩니다. 신부는 신부(father)라고 불러도 됩니다. 다만 우리들 사이에 어느 누가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사실 모두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내면의 방향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다보면 정말 엉뚱한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피가 중요하다고 수혈을 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사고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을 막고자 하셨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피를 얼마든지 내어주어도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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