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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8 주일/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살아 있는 성전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07 조회수980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순 3주일 요한 2,13-25(15.3.8)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Cleansing of the Temple

  

                            

 살아 있는 성전  

 

우리는 온전함과 순수함과 거룩함을 갈망한다. 그러나 유혹과 도전과 위기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 되라”는 근원적인 소명에 제대로 응답하기가 쉽지 않다. 거룩함에로의 부르심과 늘 그에 못미치는 응답 사이의 긴장을 우리는 살아간다. 오늘 복음에서는 채찍을 휘두르시며 분노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때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이 가까워진 날이다. 예수님은 바로 성지인 예루살렘의 성전 마당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채찍을 휘둘러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의 양과 소를 몰아내신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화가 나셨을까? 사건의 배경을 좀 더 살펴보자.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우리네의 추석만큼이나 큰 명절이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념하는 종교적 의미가 담긴 명절로서 예루살렘에서 30km 이내의 거리에 사는 유대인 장년 남자는 반드시 유월절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 사는 유대인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던 많은 유대인들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고국의 성지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내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여겼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성전에 참배하는 19세 이상의 유대인들은 누구나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로마,헬라, 이집트, 띠로, 시돈의 통화가 통용되고 있었는데, 성전세만은 유대 화폐인 갈릴리 세겔이나 성전 세겔로 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지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은 화폐를 바꾸어야만 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전상들이 바로 성전 마당에서 수수료를 받고 환전을 해주던 사람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환전상들은 대단한 폭리를 취하였던 것이다.

또한 순례자들은 감사의 제물로서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다. 제물로서 소나 양, 비둘기가 사용되었는데 성전 뜰 안에서 파는 제물만이 흠 없는 것이고 성전 밖에서 사서 가지고온 소나 양, 비둘기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전 마당에서 파는 제물만을 사야했는데 이때 또한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순례자들에 대한 부당한 착취가 공공연하게 제도적으로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짜고 이루어지고 있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그러한 장사들을 일컬어 ‘안나스의 특매점’이라고도 하였다. 예수님의 분노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불의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불의에 대한 예수님의 진노는 곧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그분의 열정이며 또한 소외된 이, 천대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난다. 장사판이 벌어지고 있던 성전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서 유일하게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성경에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불의에 대해 단호히 부정하시고 타협하지 않으신 것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 때문이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 공동체와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 자신을 한번 반성해보자.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정의로움이 추구되고 있는가? 불의한 제도나 억압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애정이 있는가? 정의를 추구하려는 공동체 차원의 연대 노력이 있는가? 혹시 우리의 성전이 가난한 이들이 있을 자리가 없는 소외의 마당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참으로 성전으로 있는가?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을 상기하자.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예레 7,4-7) 우리 모두 이제는 성당을 다니고, 성전에서 기도하며, 제사를 봉헌한다는 것만으로 쉽게 안도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을 모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의 계약을 존중하며, 주님과 같은 것을 바랄 때만, 주님이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성전이라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나의 전 인격을 통해 전 존재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삶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참된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사회도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세상 자체가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정의를 추구하고, 신자들끼리만의 독점이 아닌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다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그럴 때 우리 성전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지요 성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한국교회는 복음이고 예수인가? 오늘도 그러지 못하는 나를, 우리 공동체를, 이 한국교회와 사회를 보시며 분노하시며 내 안의 무관심과 이기심과 불의의 상을 뒤엎어 버리실 것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내 마음자리와 우리의 삶의 터에 미움과 증오, 거짓과 차별, 무관심과 불의가 있다면 어찌 성전이라 할 수 있을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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