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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17 화/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선과 악의 씨름판 한가운데서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16 조회수881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순 4 화 요한  5,1-3ㄱ. 5-16(15.3.17)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The cure at the pool of Bethesda

 

                        

 선과 악의 씨름판 한가운데서  

 

영원하신 창조주의 사랑의 작품인 인간은 늘 영원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시공의 한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늘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거룩한 안타까움과 긴장’을 피할 수 없다. 오늘의 성경말씀들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며 직면하는 선과 악의 씨름판을 보여주며, 나에게 영원을 향한 결단을 촉구하고 행복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벳자타 연못가에서 무려 서른여덟 해나 앓아온 사람을 고쳐주신다. 예수님 편에서 먼저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겪어왔다는 것을 헤아리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5,6) 하고 물으신다. 이 물음은 단지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희망을 바라느냐, 변화되기를 바라느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특이한 점은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이 병자 자신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 하고 치유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병자에게는 친구가 없고 일시적으로라도 못에 자신을 넣어줄 사람조차도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인간 편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하느님 부재’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선을 드러내신다. 동시에 이 사건은 하느님의 본성인 선(善)과 사랑을 외면한 채 그럴싸한 자기들만의 논리를 펴는 것이 얼마나 악하며 허무한지를 폭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나의 매순간의 삶도 선과 악이 씨름하는 곳이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안식일임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율법에서 금한 치유행위를 하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먼저 치유를 받은 이에게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시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5,10) 하며 시비를 건다. 이 불평은 미쉬나 율법에 의해 정당화 된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일의 종류는 어떤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외에 40가지가 있다(Shabbath 7,2).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5,16).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적대시하였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곧,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5,18)

예수님께서는 율법논쟁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하느님과 동일한 차원에 둠으로써 그의 행동을 변호한다. 곧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묶어버리는 율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창조의 호흡이라 할 수 있는 안식일의 정신을 극도로 심한 병의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 하는 일을 하셨다. 반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분의 놀라운 치유행위를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신성모독으로 보는 자기 함정에 빠져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치유받은 이를 만나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5,14)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이라는 말씀을 통해 죄가 그 어떤 육체적 질병보다도 더 나쁘다는 점을 알려주신다. 이 죄는 윤리적인 잘못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일체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분명 이 사람이 그 자신의 힘이나 장점들로 인해 선택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여기서 이 말씀을 통해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이 이미 다 처리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묻고 있다. “너는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나는 선과 악의 씨름판 한가운데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되기를 바라는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며 그 희망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육(肉)의 영(靈)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과 선과는 무관한 외형적인 규정과 제도에 얽매여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인간은 바라는 바대로 변화되고 성숙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 하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일하도록, 스스로 찾도록 도우시는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우리의 영성생활은 게으름이나 무력함 속에 절망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하느님의 은총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은 채 내맡기는 생활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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