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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영적독서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19 조회수528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영적독서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부활절 서간에서
(EP. 5,1-2: PG 26,1379-1380) 
 

부활의 신비는 육신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신앙의 유대로써 가까이 해줍니다

 

형제 여러분, 어떤 축일을 마치고 새 축일을 맞이하고, 한 기도에서 다른 기도로 옮겨 가며, 또 한 축제를 지내고 다른 축제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 주고 주님이 희생되신 복된 파스카 축제로 인도하는 그 시기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부양되며 샘에서 흘러 나오듯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 영혼은 언제나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갈증과 불타는 욕망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목마른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어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에 목말라 하는 이들을 이 축제일에 당신께로 불러들이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그런데 누가 그 샘에 가까이 나아갈 때만 갈증이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누구든 청할 때마다 물을 기거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오는 은혜는 그 축제의 순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찬란한 빛은 해가 기운다 해서 함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은 그것을 갈망하는 이들의 마음을 언제든지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 빛은 마음이 밝아져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거룩한 시편에서 이런 사람들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이여, 불신자들이 꾀하는 말을 그는 아니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망나니들 모임에 자리하지 않나니, 차라리 그의 낙은 주님의 법에 있어 밤낮으로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해 처음에 이 축제를 제정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매년 경축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을 죽음에까지 넘겨주신 분께서는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전례 시기 중 뛰어난 이 축제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 축제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그리고 이 축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형제적 공동체를 기르는 구원의 행복을 주십니다. 이 축제의 전례는 우리를 모두 한 공동체로 모아 어디에 있든지 영적으로 일치시켜 주고 함께 기도하게 해주며 하느님께 함께 감사를 바치게 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축일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자비의 기적입니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이 축제에로 함께 모이게 하시고 육신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신앙의 유대로써 가까이 해주십니다.

2015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제2권 298-299)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축일 05월 02일)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으로 여겨지는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경과 신학이 뛰어났다. 318년 부제로 서품된 후 자기 고향의 알렉산데르(Alexander)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3년 뒤인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그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반기는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시켰다. 그러나 성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에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사막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존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시편 주해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와 함께 그리스의 교회학자이자,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등이 있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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